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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8   연평해전의 진실
2015.08.21   1918년 스페인독감 in 뉴욕
2007.12.15   화랑도에 얽힌 이야기


icon 연평해전의 진실
영화 음악 | 2015. 10. 8.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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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 1918년 스페인독감 in 뉴욕
보건의료 | 2015. 8. 21. 14:30
뉴욕에서는 전쟁이 낳은 또 다른 부산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었다. 거리를 가득 수놓은 하얀 마스크의 행렬이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었다. 집배원, 교통 근로자, 열차 승객, 사무 근로자 및 공장 근로자 등 대다수 시민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이는 의무이기도 했다. 전장에서 날아은 것으로 추정되는 그 무서운 부산물은 독가스가 아니라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였다. 

심판, 포수, 타자 그리고 구경하는 관중 모두 하얀색 면 마스크를 쓰고 있다. 1918년 스페인독감이 유행하자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을 주정부는 강제하였다. 출처: 내셔널 지오그래픽




인플루엔자는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이 독감은 마치 페스트처럼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으며 놀라울 만큼 치명적이었다. 보건국장의 발표에 따르면 뉴욕에서 처음 스페인 독감 진단을 받은 사람은 3명의 상선 선원이었다. 그들은 9월 중순에 맨해튼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불과 두달 뒤인 1918년 11월, 공중위생국의 집계 결과 뉴욕 시에서만 2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소방관들과 경찰도 예외는 아니었다.




뉴욕  감영의 확산을 막기 위해 여러 규정을 부과했다. 기차를 타려는 승객 가운데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는 사람은 일단 검사에 통과해야 탑승할 수 있었다. 검사 결과 독감 증세가 조금이라도 발견되면 대중교통 이용이 금지되었다. 통근시간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드는 것을 막기 위해 기업과 공장은 업무 시작 및 종료에 시차를 두도록 했다. 학교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었지만 아이들은 입에는 마스크 를, 목에는 마늘을 걸고 등교했다. 자녀가 감염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머니들이 걸어준 것이다. 정부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극장 술집 같은 곳은 피하도록 시민들에게 권고했다. 극장은 영업 시간에 반드시 창문을 전부 열어놓아야 했다. 만약 창문을 닫았다가 경찰에 적발되면 폐업 조치가 내려졌다. 

독감, 페렴, 결핵을 예방하기 위해서 침실 창문을 열어 놓으라는 캠페인 포스터



목사들은 자발적으로 예배를 일시 중단했다. 뉴욕 주 보건부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기침이나 재채기하는것을 경범죄로 지정하여 위반시 경찰이 구금하도록 했다. 그럼에도 독감은 계속 번져나갔다. 사립병원은 병실이 가득 차서 병원을 찾는 사람들을 돌려보내야 했다. 






뷰 같은 공공병원은 환자를 거절할수는 없었지만 몸이 아픈 의사와 간호사들이 워낙 많아서 병원 휴업 여부를 놓고 이사들이 격론을 벌이기도 했다. 병실은 환자들로 넘쳐났다. 간이침대가 복도를 가득 메웠고, 문짝을 떼어내서 칸막이로 사용했다. 소아과 병동에서는 침대 하나에 아이들을 3명씩 밀어넣었다. 벨뷰에서 사망하는 환자 수는 하루 평균 10명이었고 때로는 50명이상이 죽기도 했다. “벨뷰에서 의사는 환자를 딱 두 번만 보게 되었어요." 한 인턴은 이렇게 회상했다. "환자가 입원할 때 한 번, 사망진단서에 서명할때 또 한번"



출처 : CSI in 모던타임스 (어크로스) 69 - 70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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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 화랑도에 얽힌 이야기
인문 | 2007. 12. 15. 12:57
오늘 아시는 분이 화랑도이야기를 하길래 갑자기 생각나서 전에 썼던 글을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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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황산벌영화가 뜨면서 관창과 파병문제를 연관지은 기사에 대한 것을 읽고, 화랑은 태권도가 허구의 가상이듯이 화랑역시 군사정권이 만들어낸 허구의 역사라며 반박하면서 인용한 글입니다.

재미있을 거에요.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 (2)화랑과 상무정신    
  
  [동아일보] 2001-04-07 (특집) 기획.연재 15면 05판 3469자    
  
   
학자는 정직해야 하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갈릴레오 이래 많은 학자들은 할 말을 못하고, 안 할 말을 해야 하는 일을 수없이 많이 겪었다. 역사학도 그러한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 예가 우리 역사에서 최고의 ‘청년 문화’라고 칭송받는 신라시대 화랑(花郞)에 대한 해석이다. 기존 한국사에서 평가되는 화랑의 모습은 호국의 꽃이었고, 청년 문화에 대한 찬사의 극치였다. 먼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화랑이 그토록 극찬을 받은 지는 지금으로부터 50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화랑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최초의 역사학자는 1920년대 단재 신채호(申采浩)였다. 이어 1930년대 일제 치하 일본 역사학자 미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와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가 화랑을 거론할 때만 해도 그렇게 찬란한 존재가 아니었고 그저 화랑이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청년의 애국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당시 육군본부 정훈감이었으며 나중에 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낸 역사학자 이선근(李瑄根) 대령에게 한국사에서 청년 문화의 유산을 발굴하라고 지시했다.


▼명칭 바뀐후에도 계속 여자▼
이에 따라 이 대령이 ‘화랑도연구’(1954)를 출판했을 때 화랑은 하루 아침에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청년 문화의 유산으로 부상했다. 그의 주장을 빌리면 이충무공(李忠武公), 개화파, 독립협회, 동학혁명, 3·1운동이 온통 화랑 정신을 빛낸 사람들이나 사건들이었다는 것이다.
화랑의 본래 모습이 과연 그런 것이었을까? 화랑이 당초 여자였다는 것은 학계에서도 다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최초의 화랑은 원화(源花)라고 불렸으며, 그들이 하는 일은 추석때 서라벌에서 아낙네들이 모여 패를 갈라 길쌈내기를 하던, 이를테면 부락 축제의 리더 역할이었다.
처음 원화가 된 사람은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라는 두 명의 여자였다. 그러던 것이 부락제가 국가적 행사로 자리를 잡고 규모도 확대됨에 따라 원화는 화랑이란 명칭으로 바뀌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원화가 화랑으로 바뀌었을 때에도 화랑은 여자였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사진1’을 보자. 이것은 ‘삼국유사’ 원본 중에서 화랑에 관한 부분을 복사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화랑이 ‘花郞’이 아니라 ‘花娘’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첫번째의 열쇠가 된다. ‘꽃 같은 여자’라는 말은 있어도 ‘꽃 같은 남자’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화랑은 ‘花娘’이라고 쓰는 것이 옳았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화랑을 ‘花郞’이라고 표기한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삼국유사’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문헌을 왜곡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신라나 고려 시대 사람들은 ‘花娘’을 어떻게 발음했을까? 우선 ‘사진 2’를 보자. 이 책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신 후 한자를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기 위해 편찬한 ‘동국정운’(東國正韻·국보 142호)으로 여기에는 ‘娘’을 ‘냥’이라고 발음하도록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조 최고의 어문학자였던 최세진(崔世珍)의 ‘훈몽자회’(訓蒙字會·사진3)와 조선조 후기 음운학자 정윤용(鄭允容)의 ‘자류주석’(字類註釋·사진4)에도 ‘娘’은 ‘냥’으로 발음하도록 되어 있다. 그렇다면 花娘은 어떻게 발음되었을까? 신라의 이두는 말할 것도 없고 조선조까지도 그것은 ‘화냥’이었다. ‘화랑’이 아니라 ‘화냥’이었던 것이다. 그 다음 얘기를 더 할 필요가 있겠는가?
현대 어문학의 태두인 양주동(梁柱東)은 필생의 저작인 ‘조선고가(古歌)연구’(1954)를 발간한 후 “내가 죽은 후 1세기 안에는 이 책의 일점일획도 고칠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국보(國寶)라고 칭했다. 그는 이 책에서 화랑을 언급하면서 ‘화랑이 한때 타락해 화냥의 칭호를 들었다’(372∼374쪽)고 기록했고 이선근도 그렇게 풀이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틀렸다. 화랑은 당초부터 화냥이었지 화랑이 타락해 화냥이 된 것이 아니다.
그후 삼국 중에서 신라에만 특유하게 존재하던 모계 중심 사회가 점차 퇴조를 보이면서 화랑도 남자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 때는 이름도 국선(國仙)으로 불렸으며 그 최초의 인물이 설원랑(薛原郞)이었다. 화랑이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상무(尙武)정신과 같은 남성 문화로 바뀐 것이 아니었다.
화랑의 선발 기준은 여전히 ‘얼굴이 고운 남자’(삼국사기 진흥왕 37년조)였다. 화랑이 진정 무사도였다면 왜 우람한 남자를 뽑지 않고 얼굴이 고운 남자를 뽑았을까?
그것은 모계 사회의 풍습 때문이었다. 정치와 종교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던 모계 중심의 부족 사회에서의 여왕은 부락장인 동시에 제주(祭主:무당)였고 의녀(醫女)였다. 따라서 신라의 여왕은 이미 그의 주신(主神)에게 출가한 몸이므로 결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왕이 혼자 잠자리에 들 수는 없었고, 그 얼굴 고운 남자들과 잠자리를 함께했다. 신라의 여왕들, 특히 진성여왕과 그 얼굴 고운 남자들 사이에 벌어진 진한 에로티시즘에 관한 얘기는 ‘삼국사기’ 진성여왕편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소위 세속오계(世俗五戒)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화랑을 다루고 있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해동고승전’의 어디를 봐도 화랑과 세속오계를 관련지어 설명한 곳이 없다. 미시나 아키히데의 저서 ‘신라 화랑의 연구’에는 세속오계라는 단어조차 나오지 않는다.
결국 세속오계란 화랑과 무관한 서민 청년들의 생활 규범이었다. 세속오계가 화랑의 계율이었다는 것은 이선근의 ‘소설’에나 나오는 얘기였을 뿐이다.


▼고려시대땐 '병역 면제'▼
내가 화랑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신라 후기가 되면서 화랑이 국선으로 변하고 다시 고려조에 들어오면 국선에게는 ‘병역을 면제해주었다’는 대목을 읽었을 때였다. 그것은 내게 충격적이었다. 당시는 남자들이 이리저리 군대에서 빠지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부친이 사망한 부선망(父先亡) 4대 독자로 현역에 복무한 나로서는 병역 면제자 ‘화랑’을 상무 정신의 화신처럼 설명하고 있는 한국 역사학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조선조에서 화랑은 엉뚱한 뜻으로 사용됐다. 다시 최세진의 ‘훈몽자회’에 나오는 ‘사진5’를 보자. 그림에 나타나 있는 격(覡)이라는 글자는 오늘날 박수무당을 의미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이를 ‘화랑’이라고 풀이했다는 것은 그 당시에 박수무당을 화랑이라고 불렀음을 의미한다. 같은 무당이라고 하더라도 박수(白手)무당은 백수건달(白手乾達)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한량이라는 말도 여기에서 파생됐다.
망국의 비분강개함을 느끼며 청년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화랑의 얘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던 신채호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라는 폐허 속에서 청년들을 전쟁터로 나가게 하기 위해 화랑을 무사도로 미화한 이선근의 논리는 분명 ‘빗나간 애국심’이었다. 차라리 고구려의 당나라에 대한 끈질긴 항쟁에서 청년의 기백을 찾는 것이 더 온당한 필법이었다.
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

totquf
아주 흥미있는 글이네요.
화랑에 대해서는 간간히 글을 보았는데, 역사적 맥락을 짚어
설명한 글을 보게 되었군요.

이데올로기적인 필요에 의해 역사적 사실이
의도한 목적에 맞게 조작된 대표적인 사례로 읽히는군요.

군대에서 명령에 따라 선전,선무활동을 전문으로 하는 정훈장교가
한 일이니 오죽 잘했을까요.
2003/10/25
홍춘택
관창과 화랑은 어떤 관계?
관창이 사실은 여자?
2003/10/25
icarus
화랑이 성적인 부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조선시대 제도권 밖의 매춘부를 '유녀 (遊女)' 와 '화랑 (花郎)' 이라고 부른 것에도 알 수 있습니다. 화냥년의 어원이 고려시대 포로끌려가서 돌아왔다는 還鄕女(환향녀)에서 유래한다고 배웠지만 실은 호랑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화랑이 화냥으로 읽혔으니까요. 그리고 화랑이라는 말이 매춘부를 가르켰기 때문입니다.

화랑은 남자죠. 전쟁터와 같이 '신성한곳'은 여성이 침범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의 성적욕구불만해소를 위해 여자들을 대리고 다니기 보다는 정복지의 여성이나 얼굴이 예쁘게 생긴 남성들을 대리고 다닌 것은 로마군을 비롯한 세계 거의 모든 군대들에게서 상당부분 공통으로 발견됩니다.

관창역시 그러지 않았을까요? 로마시대 유명한 장군이들이 대부분 그들 미소년출신이듯이 그들은 결코 신분적으로 낮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화랑역시 마찬가지였지 않았을까요?


매춘부는 엄격한 유교사회였던 조선 때도 존재했다. 그중 기녀 (妓女) 는 이를테면 '제도권내의 매춘부' 였으며, 제도권 밖에는 '유녀 (遊女)' 와 '화랑 (花郎)' 이라고 불리는 매춘녀들이 있었다.
2003/10/26
icarus
신복룡씨가 지은 "한국사 새로 보기(풀빛)"을 꼭 사서 읽어보세요. 흥미롭고 재미있습니다.

'한국인은 단일 혈통이 아니다' '화랑은 모계 사회의 궁남宮男들이었다' '의자왕義慈王과 3천 궁녀의 허구' '빗나간 신라중심사와 약소 민족의 논리'등이 재미있게 쓰여 있습니다. 실증적인 기법에서 기존 학설을 비판하는 그의 글은 무척 도전적이고 일격에 타인 제압하는 날카로운 劍과가 같은 글들입니다. 직접사서 읽어 보세요.
2003/10/26
icarus
그러고 보니 오늘이 박정희가 죽은 날이군요.

박통때 기억으로는 국가대표 축구팀을 1팀 2팀으로 나누었는데 1팀의 이름은 '화랑' 2팀은 '충무'였지요.

화랑도의 한자어도 원래 삼국유사에는 花娘徒로 표기되어 있는데 우리가 배운 국사책에는 花郞道로 되어 있었지요. 세속오계를 들먹이며 '무리'나 '떼'를 의미하는 도가 근엄한 단어로 변신한 것이지요.

식민사관뿐만아니라 군사파시스트정권이 심어논 역사의 오류 또한 매우 심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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