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키온-진실은 외경속에 있다. 위치로그  |  태그  |  방명록
icon 인문 에 해당하는 글130 개
2015.08.18   엄마가 딸에게 들려주는 공부를 해야하는 이유
2015.08.13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jpg
2009.05.08   Kaparot 1
2009.05.07   어린이 군대(?) 2
2009.05.07   폴라니 1
2009.05.04   상상력 1
2009.04.29   부처님오신날 현수막에 걸린 명언 1
2009.04.28   떠나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2009.04.28   나는 일필휘지를 믿지 않는다
2009.04.21   좌절
2009.04.17   주님은 천원짜리를 싫어해? 3
2009.04.14   미술시장으로 본 현대미술
2009.04.09   인간의 악의 본성
2009.04.06   빅맥세트와 인간의 자유의지
2009.04.01   사랑과 자본주의
2009.03.29   노 no
2009.02.21   네루다의 시 한편
2009.02.19   어느 시인의 눈꼴사나운 쥐박이 찬가 6
2009.02.18   무엇을 믿을 것인가?
2009.02.17   죽음을 뜻하는 한자어들 2
2009.02.14   자본은 생산요소가 아니라 권력이다.
2009.02.12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부르는 하이네 시 두편
2009.02.11   종교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독이다 4
2009.02.06   미스 조선 2
2009.02.04   침묵의 위안처
2009.01.30   "현재의 경제위기는 맑스식 위기이다."
2009.01.21   다수결과 소수의견
2009.01.17   경제적 공포
2009.01.14   싸움
2009.01.12   이스라엘 다윗의 별을 버리고 나치의 문양을 넣으려는가? 3


icon 엄마가 딸에게 들려주는 공부를 해야하는 이유
인문 | 2015. 8. 18. 09:21



공부를 왜 해야 되냐는 질문에 우리 어머니는 테이블에 녹차가 반쯤 담긴 투명한 컵을 가리키면서...

 

국어라면 "투명한 컵에 들어있는 탁한 색깔의 녹차" , 산수나 과학 이라면 "200ml 컵에 반이상 남아

있는 녹차" 사회라면 "중국산 컵에 반 정도 남아있는 시즈오카산의 녹차" 여러가지 시점으로 하나의

물건을 볼 수 있단다. 다양한 시점과 가치관은 마음을 자유스럽게 해줘. 그러기 위해 공부를 하는것이야.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jpg  (0) 2015.08.13
Kaparot  (1) 2009.05.08
어린이 군대(?)  (2) 2009.05.07
폴라니  (1) 2009.05.07
상상력  (1) 2009.05.04
부처님오신날 현수막에 걸린 명언  (1) 2009.04.29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jpg
인문 | 2015. 8. 13. 12:20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마가 딸에게 들려주는 공부를 해야하는 이유  (0) 2015.08.18
Kaparot  (1) 2009.05.08
어린이 군대(?)  (2) 2009.05.07
폴라니  (1) 2009.05.07
상상력  (1) 2009.05.04
부처님오신날 현수막에 걸린 명언  (1) 2009.04.29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Kaparot
인문 | 2009. 5. 8. 02:23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보수 전통을 고수하는 유대인들은 속죄일Yom Kippur이 오면 동물의 피를 희생 제물로 바친단다. 이것을 카파롯Kaparot이라고 부르는데, 예전에는 성전에서는 염소나 양을 이용했으나 요즘은 닭을 제물로 바친다. 장닭을 사서 속죄일이 되면 소쉐트Shochet에게로 가지고 간다. 쇼쉐트는 랍비법에 따라서 동물을 죽이는 법을 훈련받은 사람인데, 이들은 제물로 바쳐진 닭을 죽이기 전 왼손으로 닭을 잡고 오른 손을 닭 머리 위로 올려놓고 그의 머리 위에서 세 번 흔든다. 그리고 kaparot 이라고 외친후 닭의 쳐서 피를 뿌린다.

이렇게 하면 죄가 불쌍한 닭에게 전가된단다.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닭이 죽는다는 것인데..
인간의 죄까지 짊어지고 죽은 닭은 과연 죄라는 것을 알기는 알까?

이를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했다고 하는 예수는 양이나 닭같은 존재가 되나?
닭이 인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듯이..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후대사람들이 그런식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마가 딸에게 들려주는 공부를 해야하는 이유  (0) 2015.08.18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jpg  (0) 2015.08.13
어린이 군대(?)  (2) 2009.05.07
폴라니  (1) 2009.05.07
상상력  (1) 2009.05.04
부처님오신날 현수막에 걸린 명언  (1) 2009.04.29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어린이 군대(?)
인문 | 2009. 5. 7. 23:37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마가 딸에게 들려주는 공부를 해야하는 이유  (0) 2015.08.18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jpg  (0) 2015.08.13
Kaparot  (1) 2009.05.08
폴라니  (1) 2009.05.07
상상력  (1) 2009.05.04
부처님오신날 현수막에 걸린 명언  (1) 2009.04.29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폴라니
인문 | 2009. 5. 7. 00:15

‘시장이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러니 시장을 가만 놔둬라.’ 하이에크식 신자유주의의 핵심이다. 폴라니는 그 반대편에 선다. ‘시장을 사회의 지배 아래 둬라.’ 이 점에서 마르크스·케인스와 구분된다. 마르크스는 ‘시장의 철폐’를 요구했고, 케인스는 ‘시장에 대한 국가의 (재정) 개입’을 주장했다. 마르크스처럼 시장을 부정하진 않고, 케인스처럼 재정 개입이 해법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폴라니는 시장의 존재를 인정하되, 그것을 사회의 지배 아래에 둘 것을 요청했다.

폴라니가 보기에 어떤 경우에도 ‘상품화’시키면 안 될 것이 세 가지 있다. 노동·자연·화폐다. 재화를 교환하는 시장은 필요하다. 그러나 노동·자연·화폐를 시장에서 ‘자유방임’으로 거래하면 곧바로 재앙이 시작된다. 노동은 인간의 다른 이름이다. 인간은 상품 가치와 경제적 이익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존재다. 토지를 비롯한 자연도 인간이 생산할 수 없다. 시장에서 버려지거나 낭비되면 복구할 수도 없다. 화폐는 구매력의 징표일 뿐이다. ‘생산’되지 않는다. 개인이 뜻한 대로 늘리고 줄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또는 세계 금융 체제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인간·자연을 상품화한 뒤에 화폐까지 사고팔 수 있다는 환상을 심은 게 바로 ‘시장자유’, 즉 ‘자기 조정 시장’의 결정적 폐해라고 폴라니는 생각한다.

시장자유는 인류 문명 전체를 위기로 몰고 간다. 노동자·농민은 물론 생산기업까지도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신화의 피해자다. 금융시장에서 화폐가 거래되는 방식 때문에 생산기업은 주기적으로 파산될 수밖에 없다. 그 기업이 만들어내는 재화가 아무리 가치 있는 것이라 해도 그렇다. 자유시장 경제체제에서는 일하는 사람, 기업하는 사람 모두 항상적인 빈곤과 불안에 시달린다.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내버려만 두면 인류의 자유가 증대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완전히 거짓말이라고 폴라니는 지적한다. 실제로는 그 반대의 일이 거듭되고 있다. 오히려 인류의 자유가 시장에 의해 억압받고 있다.

폴라니는 국가의 개입을 해결책으로 내놓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국가)사회주의나 파시즘을 싫어했다. 시장을 사회로부터 떼내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를 떼내 절대화하는 것을 폴라니는 용납할 수 없었다. 두 방식 모두 인간 사회를 황폐화하는 것은 똑같다고 여겼다. 굳이 표현하자면 폴라니는 국가 대신 ‘사회의 개입’을 내세운다.
원래부터 경제는 인간 사회의 한 부분이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마치 정치와 문화가 사회의 한 부분인 것처럼, 경제 역시 사회적 합의 구조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경제는 사회 구성원의 소통·도움·합의 등에 의해 얼마든지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사회’란 요즘의 개념으로는 ‘시민사회’와 비슷하다. 노동자·농민·시민·생산기업가 등을 두루 아우르는 개념이다.

이들의 경제 문제를 ‘사회적으로’ 푸는 세 가지 방식을 폴라니는 제시한다. 공동체·협동조합을 통한 상호부조, 시장을 통한 재화의 교환, 국가를 통한 사회적 서비스 제공 등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가운데 어느 하나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폴라니는 세 요소의 ‘공존’에 무게를 실었다. 다만 시장자유주의에서 결여된 것이 상호부조와 사회적 서비스 제공이므로, 두 요소의 ‘복원’이 좀더 중요하다고 봤다.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24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jpg  (0) 2015.08.13
Kaparot  (1) 2009.05.08
어린이 군대(?)  (2) 2009.05.07
상상력  (1) 2009.05.04
부처님오신날 현수막에 걸린 명언  (1) 2009.04.29
떠나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0) 2009.04.28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상상력
인문 | 2009. 5. 4. 15:39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Imagination is more important than knowledge.

                                            Albert Einstein

출처: http://scent.ndsl.kr/View.do


 
아인슈타인 명언 상세보기
<b>아인슈타인</b> 지음 | 보누스 펴냄
명언을 통해 만나는 소탈하고 엉뚱한 아인슈타인!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삶 속에 남긴 명언을 엮은 책 『아인슈타인 명언 - 나는 다시 태어나면 배관공이 되고 싶다』. '명언'이라고는 하지만 단지 그럴 듯한...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Kaparot  (1) 2009.05.08
어린이 군대(?)  (2) 2009.05.07
폴라니  (1) 2009.05.07
부처님오신날 현수막에 걸린 명언  (1) 2009.04.29
떠나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0) 2009.04.28
나는 일필휘지를 믿지 않는다  (0) 2009.04.28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부처님오신날 현수막에 걸린 명언
인문 | 2009. 4. 29. 14:48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가 주로 가는 블로그중에 하나인 '사진은 권력이다' 안양천변 자전거도로의 끝은 어디일까? (삼성 블루 IT100동행기)
 라는 포스트에서 본 사진입니다.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마라.




현재 정치적으로 상황을 대비시켜도 교훈적인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 살아가면서 온갖 굴욕을 겪을때에도 새겨 두면 좋을 듯한 명언입니다.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린이 군대(?)  (2) 2009.05.07
폴라니  (1) 2009.05.07
상상력  (1) 2009.05.04
떠나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0) 2009.04.28
나는 일필휘지를 믿지 않는다  (0) 2009.04.28
좌절  (0) 2009.04.21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떠나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인문 | 2009. 4. 28. 18:02

떠나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정하



나를 떠나간 것들은 수없이 많았다.

강물처럼 흘러간 것들,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 것들,

내곁에 한참이나 머문 것들도 더러 있었지만

결국 그것들도 때가 되면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매번 나는 안타까웠고 슬펐다.

잡으려 할 수록 떠날 시기만 앞당겨졌을 뿐이었고,

잡으려 할 수록 그것들은 더 멀어져갈 뿐이었다.

세월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랑도, 청춘도, 마찬가지였다.

내곁에 머물게 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 어디 있으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들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 뿐이었다.

떠나간 것들이 다시 올 것이라고 믿지말라.

행여 소식이라도 전해올까 기웃거리지 말라.

전화기도 꺼 두고, 이메일도 열어 보지 말라.

한 번 떠나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떠난 것들이 다시 돌아오는 법은 없다...


알면서도 헛된 꿈에서 벗어나기 어렵죠.
그것이 인생인 것 같습니다.

또 그래서 살아가는 것 이고요.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폴라니  (1) 2009.05.07
상상력  (1) 2009.05.04
부처님오신날 현수막에 걸린 명언  (1) 2009.04.29
나는 일필휘지를 믿지 않는다  (0) 2009.04.28
좌절  (0) 2009.04.21
주님은 천원짜리를 싫어해?  (3) 2009.04.17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나는 일필휘지를 믿지 않는다
인문 | 2009. 4. 28. 07:23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는 일필휘지를 믿지 않는다.


전주한옥마을 내에 위치한 혼불의 작가 최명희문학관에 있는 글귀가 지금도 뇌리에 자꾸 맴돕니다.

그녀는 "원고지 한칸마다 나 자신을 조금씩 덮어 놓듯이 글을 써내려갔다."라면서 자신의 고단한 글쓰기를 표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천필만필이 주는 다듬어진 힘이 좋다'라고 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 사진은 문학관 입구에 놓인 원고입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님을 새기는 것' 처럼 써내려간 원고들입니다. 그리고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나가는 것' 들입니다.

글을 쓰시는 것이 얼마나 힘드셨으면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존경심이 절로 납니다.

저는 글을 쓸때 가볍게 써내가는 스타일인데... 인스턴트커피처럼 한번 읽고 버리는...
그래서 저는 천상 글쟁이가 아닌 모양입니다. 문과를 가지 않고 이과를 선택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문학관 입구에 독정제獨鼎齊라고 쓰여 있더군요.
무슨 뜻일까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결론은 잘 모르겠다는 것 입니다.
정제라고 불리우는 화가분의 호가 있긴 있던데...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가 정말 쓰고 싶었던 것은

딱 한가지로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다는 것입니다


1997년 11회 단재상 수상소감에서 말씀하신 것 이라는데...

이 말씀도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끝없이 뇌리에서 머무는 군요.
제가 인생을 더 살아야 알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상력  (1) 2009.05.04
부처님오신날 현수막에 걸린 명언  (1) 2009.04.29
떠나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0) 2009.04.28
좌절  (0) 2009.04.21
주님은 천원짜리를 싫어해?  (3) 2009.04.17
미술시장으로 본 현대미술  (0) 2009.04.14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좌절
인문 | 2009. 4. 21. 15:22



좌절의 원인은
당신이 메고 있는 짐이 아니라
짐을 들고 가는 방향에 있다.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주님은 천원짜리를 싫어해?
인문 | 2009. 4. 17. 19:24




주님이 싫어하는 천원짜리도 누구에겐가는 생명을 건질 수 있는 유용한 돈일 수 있답니다.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떠나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0) 2009.04.28
나는 일필휘지를 믿지 않는다  (0) 2009.04.28
좌절  (0) 2009.04.21
미술시장으로 본 현대미술  (0) 2009.04.14
인간의 악의 본성  (0) 2009.04.09
빅맥세트와 인간의 자유의지  (0) 2009.04.06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미술시장으로 본 현대미술
인문 | 2009. 4. 14. 17:02

제 블러그 연재글인 오늘의 미술 을 포스팅한지 오래 되었군요.

유명작가의 작품보다는 미술계에는 이름이 비교적 알려져 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작품을 소개하고 제 자신 공부하는 취지로 포스팅하던 것 인데, 요즘 이래저래 미술작품 검색에 대해서 소홀해서 뜸 했습니다.

포스팅 연재를 위한 공부도 할겸, 그 전부터 꾸준한 관심영역이었던 미술시장에 대해서 공부도 할겸 해서 이진아도서관에서 '미술시장으로 본 현대 미술- 미술시장의 유혹'이라는 책을 대여 했습니다.


뉴욕미술시장을 중심으로 역사와 다양한 에피소드, 그리고 현대미술작가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어서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다만 미술시장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건너오는 과정에 대한 역사를 소개하는데 초딩적인 역사관들을 기술한 부분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에 거슬리더군요. 가령 '프랑스가 전쟁(2차세계대전)후 공산주의 노선을 선택'했다는등 사실관계도 맞지 않는....



큐레이터가 쓴 글이니 그러려니 하면서 읽고 있습니다. 


책이 미술화보를 싣기에 넓은 판형으로 되어 있고 풍부한 화보들이 썩 마음에 듭니다.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일필휘지를 믿지 않는다  (0) 2009.04.28
좌절  (0) 2009.04.21
주님은 천원짜리를 싫어해?  (3) 2009.04.17
인간의 악의 본성  (0) 2009.04.09
빅맥세트와 인간의 자유의지  (0) 2009.04.06
사랑과 자본주의  (0) 2009.04.01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인간의 악의 본성
인문 | 2009. 4. 9. 18:30


인간의 본성 속에 어두운 면이 있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 인간의 어두운 본성은 문화나 빈곤, 정신병리, 미디어의 폭력에 노출 되는 것 같은 현대적인 질병 탓이 아니다. 그런 것으로 원인을 돌린다고 해서 어두운 본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위험은 거울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을 응시하지 못하고, 모두의 내면에 있는 악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다. 

데이비드 버스  '악의 진화'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좌절  (0) 2009.04.21
주님은 천원짜리를 싫어해?  (3) 2009.04.17
미술시장으로 본 현대미술  (0) 2009.04.14
빅맥세트와 인간의 자유의지  (0) 2009.04.06
사랑과 자본주의  (0) 2009.04.01
노 no  (0) 2009.03.29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빅맥세트와 인간의 자유의지
인문 | 2009. 4. 6. 10:58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2년 미국에서 10대들이 맥도날드를 상대로 자신들을 비만으로 이끌었다며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맥도날드가 호도성광고와 판매기법으로 뉴욕 십대 청소년들을 과식으로 유도하고 비만으로 이끈 주원인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일은 소송천국 미국의 단면을 보여준 사건으로 세계인의 눈에 띄었습니다. 소송을 제기한 청소년들은 엄청난 비난에 직면하게 됩니다. 자신의 탐식과 방만의 책임을 기업한테 돌려서 돈이나 뜯어 내려는 부도덕한 모습으로 비추어졌던 것 입니다.
 
즉 개인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의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려는 비겁한 모습으로 보여 졌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 소송은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소송이었습니다. 햄버거가게에서 우리는 자유의지대로 메뉴를 선택하고 있는가하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4,500원에 감자튀김과 콜라를 추가해서 드시지 않으시겠어요?” 종업원이 이렇게 물으면, 모두들 그냥 햄버거만 달라고 하게 됩니다. 하지만 “900원만 더 내시면 감자튀김과 콜라를 함께 드실 수 있는데, 그렇게 해 드릴까요?”라고 물으면, 아무런 의지적 고민 없이 “예! 그렇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게 됩니다.

"900원만 더 내시면 감자튀김과 콜라를 함께 드실 수 있는데, 그렇게 해 드릴까요?" 이 한마디에는 고객이 애초에 구매할 생각이 없는 품목을 충동구매하게 해서 매출을 더 늘리는 전략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런 판매기법을 슈퍼사이징이라고 부릅니다. 패스트점이나 식당등에서 세트메뉴를 만들어서 각각 살때보다 더 싸게 구입하게 함으로서 소비자가 애초에 구입할 의사가 없었던 품목까지 사도록 충동을 일으키는 판매기법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데로 행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누군가 만들어논 규칙내에서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꼭두각시일 수 있습니다. 슈퍼사이징은 개인들이 가진 의식적인 판단력을 어지럽히려고 의도적으로 고안된 것이며, 실제로 시장에서 잘 먹혀 들어갑니다. 패스트푸드 업체들은 질문의 틀이나 형식을 바꾸면 소비자들의 분석력을 약화시킬수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이를통해 더 많은 이득을 취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경제학자 갤브레이스는 자유시장이라는 표현은 허구라고 주장하면서 '조직되지 않은 소비는 없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기업측에서 광고와 마케팅등으로 소비의식을 조직하지 않고서는 연필한자루도 판매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우리는 이런 보이지않은 조직속에서 불가피하게 선택하고 소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기업과 기업의 경쟁도 치열하지요.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소비자들의 구매심리가 조직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현대 사회의 법질서와 규범은 모두 각각의 개인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원리에서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묻는 법질서가 가능해진 것이지요. 신의 의지의 부속물이 아니라..

하지만 심리학, 인간행동학, 정신분석학등의 과학이 발달하면서 맥도날드 마케팅담당자부터 정치컨설턴팅까지 인간의 자유의지가 얼마나 허약한 이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헛점을 파고드는 기법들을 구사하면서 자신들의 현재의 기득권이 대중들의 자발적인 동의(투표나 매출에서)에 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우리의 자유의지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는 사회가 심화된다면 근대혁명역사처럼 또 다시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전혀 다른 선택의 기로에 직면하지는 않을까요?

뉴욕의 철없는 10대들의 소송이라고 치부할 수도있는 사건에서 우리는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이 처한 위기를 읽을 수도 있습니다.


참고문헌: 에릭 캔들 "자유의지가 없다면 행위의 책임을 인간에게 물을 수 있는가"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님은 천원짜리를 싫어해?  (3) 2009.04.17
미술시장으로 본 현대미술  (0) 2009.04.14
인간의 악의 본성  (0) 2009.04.09
사랑과 자본주의  (0) 2009.04.01
노 no  (0) 2009.03.29
네루다의 시 한편  (0) 2009.02.21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사랑과 자본주의
인문 | 2009. 4. 1. 23:48


사랑과 자본주의
둘다 인간의 탐욕에 기반한다.
그래서 멈추어서면 파멸한다.


그리고 언제나 처럼 새로운 사랑은 찾아오고
새로운 세상도 만들어진다.

우리 삶이 계속되는 한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술시장으로 본 현대미술  (0) 2009.04.14
인간의 악의 본성  (0) 2009.04.09
빅맥세트와 인간의 자유의지  (0) 2009.04.06
노 no  (0) 2009.03.29
네루다의 시 한편  (0) 2009.02.21
어느 시인의 눈꼴사나운 쥐박이 찬가  (6) 2009.02.19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노 no
인문 | 2009. 3. 29. 15:55



 

여자들이 노라는 대답을 힘겹게 받아들이는지 알지?
세살무렵이면 벌써 힘들어 하지.

남자들은요?

남자들이야 이골이 났지. 흔한 일이니까.



"노인의 나라는 없다"  251p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의 악의 본성  (0) 2009.04.09
빅맥세트와 인간의 자유의지  (0) 2009.04.06
사랑과 자본주의  (0) 2009.04.01
네루다의 시 한편  (0) 2009.02.21
어느 시인의 눈꼴사나운 쥐박이 찬가  (6) 2009.02.19
무엇을 믿을 것인가?  (0) 2009.02.18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네루다의 시 한편
인문 | 2009. 2. 21. 14:48



                             
                                  점(點)

                                                               파블로 네루다




               아픔보다 더 넓은 공간은 없다

               피를 흘리는 아픔에 견줄만한 우주도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빅맥세트와 인간의 자유의지  (0) 2009.04.06
사랑과 자본주의  (0) 2009.04.01
노 no  (0) 2009.03.29
어느 시인의 눈꼴사나운 쥐박이 찬가  (6) 2009.02.19
무엇을 믿을 것인가?  (0) 2009.02.18
죽음을 뜻하는 한자어들  (2) 2009.02.17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어느 시인의 눈꼴사나운 쥐박이 찬가
인문 | 2009. 2. 19. 19:13
이명박이 계간 "시와 시학"이라는 잡지에 기고문을 실었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시가 함석헌선생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랍니다.


그러면서 어릴때 꿈이 시인이었다고 하는 헛소리를 지껄인 모양입니다.
2MB가 허튼소리하는 것은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언행으로 보아서 뭔소린들 못하겠습니까?

더 놀라운 것은 신달자라는 시인이 낯간지러운 찬양가를 읊어댔군요.

그녀는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심'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다음같이 노래합니다.  


"대통령님의 글은 저의 어둡던 마음에 빛을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자각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시심이야말로 이 세상의 가장 무거운 것을 들 수 있는 힘이라는 사실을 거듭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스스로 창피한 줄도 모르는 파렴치한적인 시인의 행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일개 정치인이 시인을 자각시키고 어둡던 마음에 광명을 찾아준다는 표현은 북한이나 히틀러, 스탈린치하의 독재국가에서나 볼 줄 알았는데....

어떤 자칭 정치인은  백두산천지에서 '이명박만세'를 부르지 않나..

아무튼 이명박은 시인이 되는 것이 좋을 뻔했습니다.
대통령이 되어 가지고 본인은 능력도 안되는데 분에 넘치는 대통령노릇하니라고 힘들어하고
국민들은 무능하고 무식한 지도자 만나서 고생만하는 군요.

신달자씨는 쥐구멍이나 빨면서 시심이나 키우시길...
아니면... (이하는 상상가능한 모든 욕들을 넣어서 생각해보시길)  


관련 기사

http://media.daum.net/culture/others/view.html?cateid=1026&newsid=20090218185510285&p=yonhap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과 자본주의  (0) 2009.04.01
노 no  (0) 2009.03.29
네루다의 시 한편  (0) 2009.02.21
무엇을 믿을 것인가?  (0) 2009.02.18
죽음을 뜻하는 한자어들  (2) 2009.02.17
자본은 생산요소가 아니라 권력이다.  (0) 2009.02.14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무엇을 믿을 것인가?
인문 | 2009. 2. 18. 13:53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관장하신다는 신앙인과 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무신론자간의 사이는 논쟁은 항상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성경을 신의 계시와 말씀으로 이해는 신앙인과 하나의 문학작품이나 신화로 이해하는 무신론자간의 토론은 그 자체가 무의미하게 보입니다. 그런 무의미한 도전을 한 두 지식인의 이야기를 묶은 책이 "무엇을 믿을 것인가"(열린책들)라는 책입니다.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와 차기 교황으로 유력한 마르티니추기경간의 서한형식의 질의응답식으로 묶은 이 책은 모처럼 만에 읽는 명저입니다. 100쪽 약간 넘는 얄팍한 책에서 둔직한 무게감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대화는 네가지 주제를 가지고 하게 됩니다.  대화를 하는 그들은 마지막을 제외하고는 에코가 먼저 묻고 마르티니가 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에 에코는 "철학자는 문제제기를 전문으로 하면서도 그 답을 모르고 있음에 반해, 영혼의 목자인 사제는 어떤 질문에도 정답을 가지고 있다"라는 세간의 선입관을 꼬집으면서 투정부리며 대화를 시작합니다. 카톨릭교회등 정통 보수종교단체들이 왜 여성성직자들을 거부하는지 대한 날카로운 질문에 마르티니는 요즘의 교회는 오랜 세월동안 오로지 남성에게만 사제직을 부여하기 위해 내세웠던 논거-즉, 여자는 불결하고, 사악하며, 음란한-들을 더 이상 제시될 수 없다라고 하면서 "한같 인간의 논리가 아니라 구원의 사건들에 충실하려는 교회의 열망"임을 말합니다. 즉답을 피한 것이지요. 흔히 신앙인들이 논리가 궁핍하면 교회담벼락 안으로 숨어버리듯 말입니다.


이제 마르티니가 묻습니다. 비신앙인들이 "종교적 근거에 비추어 보지 않아도 올바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확신합니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서도 자기들의 도덕적인 신념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목숨까지 받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들이 궁극적으로 자기들의 행위에 어떻게 정당성을 부여 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즉 인간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힘은 절대자에서 나오고 비신앙인들은 그것을 미쳐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비유입니다.

에코는 말합니다. 인간이 죽음까지 감수하는 이타적 행동은 신념과 도덕심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신념과 도덕성 등의 윤리의식은 타자의 존재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규정하고 우리를 형성하는 것은 바로 타자이며 타자의 시선입니다. 먹지않거나 자지않고 살 수 없듯이, 우리는 타자의 시선과 응답이 없으면 우리는 누구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살인하고 강간하고 모욕하고 도둑질하는 사람도 예외일때만 그런 짓을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남에게 칭찬과 사랑과 존경을 구걸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계하고 용서를 구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절대자의 구원에 대한 신념이 없이는 발생할 수 없다는 마르티니의 의문에도 이렇게 답합니다.


비신앙인은 아무도 위에서 자기를 내려다 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는 이 세상에 자기 죄를 용서할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도 압니다. 만일 그가 악행을 저질렀다면 무한할 것이고 그의 죽음은 절망적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신앙인보다 더 과감하게 죄를 고백하면서 남들의 용서를 구하고 죄를 씻으려 할 것입니다. 또한 남의 용서를 구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남을 용서해야 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말이 바로 자신과 타자사이에 라는 뜻이듯이 우리는 타자의 존재에 의해 윤리가 '자연발생'한다는 에코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2000여년 넘게 절대자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둔 윤리속에 갇혀있었던 서구의 지성들이 이를 극복하고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사상의 만개를 이룩한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카톨릭신자인 후배가 저에게 "우리가 예수를 찾는 이유는?"이라는 책을 주면서 왜 우리가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갈구"하는가 하면서 그것은 바로 "영에 대한 목마름"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지식에 대한 목마름으로 가득차 있는 제가 결코 느낄 수 없었던 "영에 대한 목마름"을 집어낸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지식에 대한 목마른자도, 영에 대해서 목마른자도 적절하게 이끌어주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상세보기
움베르토 <b>에코</b>.마르티니 지음 | 열린책들 펴냄
새로운 묵시록에 대한 세속의 강박 관념, 희망은 종말을 궁극 목적 으로 바꾼다, 인간의 생명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나누어 주신 것이다 등 희망과 생명, 여성에 관한 이탈리아...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죽음을 뜻하는 한자어들
인문 | 2009. 2. 17. 09:32
김수환추기경이 어제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실었군요. 그가 현대사에 미친 영향력을 생각하면 당연하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이상한 용어 하나가 신경을 거스르게 하네요.

바로 선종善終이라는 표현인데...

선종이라는 표현이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마 2005년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망때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선종은 카톨릭에서 높은 지위의 성직자가 죽음을 맞이할때 사용하는 용어인 것으로 보입니다.


선종 善終 : 가톨릭에서, 임종할 때 성사(聖事)를 받아 대죄(大罪)가 없는 상태에서 죽는 일을 이르는 말.


성직자들의 죽음을 일반신도와 다르게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한 것은 불교가 단연 최고라고 생각됩니다.  고승高僧이라도 죽게되면 열반槃, 입적入寂 이라는 표현을 쓰게 됩니다.  

열반  : 모든 번뇌의 얽매임에서 벗어나고, 진리를 깨달아 불생불멸의 법을 체득하는 경지. 불교에서 수행을 통해 도달하는 궁극적 경지.

입적 入寂 : 열반에 들다

위 용어들은 일반 신도의 죽음에서는 쓰이지 않고 보통 고승(高僧)의 죽음에서만 쓰지요. '입멸(入滅)' '귀적(歸寂)' 등도 비슷한 용도로 쓰인다고 합니다.


개신교에서는 특별한 용어가 보이지 않는 군요. 개신교는 원래 성직자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은 전통에서 출발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한국대형교회처럼 목사들이 예수처럼 행사하는 권력자들인 만큼 그들도 곧 자극을 받아서 새로운 용어를 만들지 않을까요?

보통 권력자나 높은 신분의 사람이 죽으면 보통 서거라는 표현을 쓰는데 별다른 뜻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이는 보통 죽었다라는 한자어 사거死去의 높힘말입니다.

서거 逝去  <사거(死去)>의 높임말.

사거死去  죽어서 세상을 떠남. 사망.


한자어에는 유독 죽음을 뜻하는 한자어들이 많습니다. '별세(別世)' '운명(殞命)' '절명(絶命)' '기세(棄世)' '영서(永逝)' 임종(臨終)' '작고(作故)' 등등
이들 용어들은 죽음을 바라보는 당대의 철학을 반영하기도 하고, 신앙관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존귀한 자의 죽음을 추모하는 뜻에서 높혀 부르기 위해서 다양한 한자어들이 등장 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무튼 무릇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명성이 높은 사람들의 죽음을 높혀서 표현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일지 모르지만 만약 외국언론이었다면 'Dead' 로 간략하게 표현될텐데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죽음을 다른식으로 표현해온 것은 중국문화권의 오래된 관습인데, 이것이 서양에서 유래한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그 문화에 전염 된 모양입니다.

사서오경중에 하나인 예기에서는  '예기(禮記)'에서는 '천자는 붕(崩), 제후는 훙(薨), 대부는 졸(卒), 사는 불록(不祿), 서민은 사(死)라고 규정하였다고 합니다. 철저한 계급사회다운 발상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요즘도 용산참사처럼 일반인이 죽으면 '사망(死亡)'이고 대통령쯤 되는 위인이 죽으면 '서거(逝去)'고 유명한 사람이 죽으면 '타계(他界)'나 '영면(永眠)'이라는 표현으로 신분에 따른 용어를 다르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죽었는데 신분에 따라 죽음 뜻하는 용어도 다르다는 것은 막 청동기를 벗어난 기원전이나 인터넷시대인 현대에도 한국사회에서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죽은 이를 높이는 것은 충분히 아름다운 일이지만, 지위를 가지고 쓰는 말을 달리하는 일은 없어졌으면 합니다. 추기경의 죽음도 선종이면 일반 카톨릭신자의 죽음도 선종이어야 합니다. 그 말뜻 그대로였는 선종이었는지는 별도로...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자본은 생산요소가 아니라 권력이다.
인문 | 2009. 2. 14. 15:32
신고전파도 마르크스주의도 자본을 생산요소로 규정했는데, 베블런은 이런 규정을 기각하고 자본을 사회적 권력의 한 형태로 보았다.

베블런은 자본이 생산요소라는 주장, 다시 말해 자본가가 자본을 투여해 더 많은 부를 창출한다는 주장은 신화적 허구라고 말한다. 생산성의 진정한 원천은 지식이다. 이때의 지식은 사회 공동체가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해온 모든 경험과 기술, 발명과 발견의 총체다. 이 총체적인 사회적 지식이 생산성의 진정한 원천이다. 사회의 총체적 지식은 공장이나 기계와 같은 특정 사물로 체현되는데, 바로 이 사물을 자기 것으로 전유한 자본가들이 이 사물을 부르는 이름이 자본이다. 그러므로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보자면, 자본은 생산의 요소가 아니라 생산의 영역에서 발휘되는 자본가의 권력일 뿐이다. 그 권력의 바탕이 바로 소유권이다. 이 소유권은 ‘무언가를 사용할 권리’가 아니라 ‘무언가를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게 할 권리’다. 자본가가 이 소유권을 근거로 삼아 공동체 전체의 지식을 ‘볼모’로 잡은 뒤 사회 전체로부터 ‘몸값’을 뜯어내는데, 그것이 이윤이라고 베블런은 말한다.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한겨레서평에서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외 상세보기
소스타인 베블런 지음 | 책세상 펴냄
『책세상문고 고전의 세계』제70권《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외》. 이 책은 베블런의...시장으로 대표되는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 자본주의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자본의 본성을 해명하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부르는 하이네 시 두편
인문 | 2009. 2. 12. 09:25




                               세상사


                     많이 가진 자는 금방 또
                     더 많이 갖게 될 것이고
                     조금 밖에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그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땡전 한 닢없이 당신이 빈털털이라면
                     아 그대는 무덤이나 파는 수 밖에
                     이 세상에서 살 권리가 있는 자는
                     뭔가 가지고 있는 놈들 뿐이니까.




하이네하면 영문학이나 시에 대해서 문외한인 사람들도
한번쯤은 들어본 이름일 것이다.

그것은 중고등학교때 한번쯤은 흥얼거렸을 로렐라이라는 유명한
노래의 가사가 바로 하이네의 시이기 때문이다.

문학에 관심이 있던 친구들이나
중고교시절 짝사랑해던 이성에게 편지를 쓸때에는
하이네의 시가 좋은 벗이 되어 주곤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인리히 하이네 는 그렇게 우리들에게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교과서에는 절대 나올 수 없는 현실참여적인 시도 많이 썼다.

위에 있는 "세상사"라는 시도 그 중에 하나이다.

그는 초기에 낭만적인 시들로 명성을 얻었지만 프랑스 7월혁명에
감동을 받아 언론인으로서 또한 시인으로서
민주주의와 민중들의 편에서서 많은 논설과 시를 쓰게 된다.
 
그가 꿈꾸었던 혁명은 독일에서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의 시와 노래가 쌓여서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꽃을 피웠다고 생각한다.





                                룸펜 근성


                      부자를 구슬려 먹는 데는
                      납작한 아첨이 최고란다
                      돈이란 게 아마 납작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납작하게 구슬려 먹는 것이다.


                      신성한 황금송아지 앞에라도 가게되면
                      향로를 마음껏 흔들어 줘라
                      쓰레기 속에서도 절하고 똥 속에서도 절해라 그러나
                      찬양할 때는 어중간하게 하지 말고 극구 찬양하라


                       금년에는 빵값이 비싸다
                       하지만 최고의 아첨은
                       무료단다 한 푼도 들지않는
                       주인의 개라도 추겨세워 주고 배터지게 먹어라.
 


150여년전의 시가 지금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시대가 퇴행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엇을 믿을 것인가?  (0) 2009.02.18
죽음을 뜻하는 한자어들  (2) 2009.02.17
자본은 생산요소가 아니라 권력이다.  (0) 2009.02.14
종교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독이다  (4) 2009.02.11
미스 조선  (2) 2009.02.06
침묵의 위안처  (0) 2009.02.04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종교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독이다
인문 | 2009. 2. 11. 16:46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BBC 다큐멘터리 Root of all evil? 중에서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미스 조선
인문 | 2009. 2. 6. 09:43
어제 내가 만난 그림, 내가 만난 세상 블러그에서 재미있는 포스팅을 보았다.
1940년 '미스 조선' 이라는 포스팅에서 재미있는 사진을 걸었군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른쪽 분이 미스조선으로 뽑히신 분 같은데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손색 없을 정도의 미모입니다.
자그마한 두상에 또렷한 이목구비등...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면 북한 미녀같기도 합니다.
트로피를 준 것도 눈에 띄는 군요.



그래서 미스조선에 대해서 더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31년 10월 22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미스조선선발대회 내용이 실렸는데
흥미로운 내용이 많군요.
 

미스 조선 두 여인, 대판매일(大阪每日新聞) 주최

대판매일신문사 주최의 [미스 조선] 모집은 용모 여인(麗人) 조선인측 47명, 내지인측 178명 합계 225명의 다수에 달하여 실로 백화경영의 비경을 연출하였는데 내선명사 22명, 심사원이 십오만 사천 사백 육십 칠 매라는 투표 속에서 엄정히 심사한 결과는 마침내 조선인측과 내지인측에서 아래와 같은 두 여인이 최고의 득표로 '미스 조선'에 당선되었다.

(사진은 당선된 두 여인 이명숙(상) 양과 키쿠치 이치꼬(하) 양)

조선인측 ㅡ 경성부 이명숙, 방년 18세, 신장 5척 2촌, 체중 13관, 경성여자상업 출신, 직업여성, 득표 일만 1만 5천 7백 64표

내지인측 ㅡ 인천부 키쿠치 이치꼬, 방년 20세, 신장 5척, 체중 12관 7백근, 인천고녀 출신, 득표 2만 5천 3백 80표



대판(大阪)이라면 오사카를 말하는 것인데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대판매일신문)에서 개최하고, 조선총독부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실린 내용입니다.

일본 오사카에 있는 신문사가 조선에서 미인선발대회를 개최한 것도 특이하고(물론 식민지시절이었으니까 가능하겠지만) 조선인과 일본인이 참석해서 각각 1인식 뽑은 것도 특이합니다.
무엇보다 더 믿을 수 없는 것이 15만4천명이 넘는 투표인원이 참석했다는 것은 더 더욱 믿기 힘들군요. 당시에도 미디어 영향력이 상당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궁금한 것이 조선최초의 미인선발대회는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해방후 첫 미인대회는 공식적으로는 (미스코리아주최측에 따르면)
1957년 5월에 열렸다고 합니다. 박현옥이라는 분이 진에 당선되셨다는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1대 미스코리아 박현옥




그런데 미인대회 야사가 많고 뚜렷한 역사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국 최초의 미인대회는? 미스 코리아1호 강귀희 라는 글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미인선발 대회의 성격을 띠기 시작한 시기는 1953년 5월의 제1회 여성경염대회때부터였다."라고 주장합니다. 미스코리아주최측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링크된 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조그마한 미인대회는 일제시대나 해방후나 많이 열린 모양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53년에 선발된 강귀희씨



해방후의 역사도 이렇게 부정확한데 일제강점기시절의 역사야 더 말할 나위 없겠죠.
좀더 살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도 이런 미시사(微視史)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학계에서 연구를 해주었으면 합니다.
미인선발대회야말로 우리나라가 근대라는 시대를 만난 지점을 대변하는 사안이고
식민지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소재이고, 서구문명과 만나는 이벤트로서의 역사에
중요한 시사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미스코리아대회가 여성들을 성품화한다고 해서 부정적인 여론때문에 명성이 옛날만 못하죠.
미스코리아에 뽑히면 부와 명성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었던 시절은 이제 과거가 되어버렸습니다.

개인적으로 미인선발대회에 대해서 부정적이지만
이 대회가 중단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당대의 여성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평가해왔는가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지침이 되기도 하고
그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  


관련 홈페이지 : 미스코리아선발대회 공식 홈페이지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침묵의 위안처
인문 | 2009. 2. 4. 09:12

나는 불가지론자이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종교를 반대하고 싶지는 않다.
종교가 묵상의 위대함이 존중받고 인생의 위안만 될 수 있다면...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현재의 경제위기는 맑스식 위기이다."
인문 | 2009. 1. 30. 16:33
미국 컬럼비아주립대UCLA 교수이자 맑스주의 역사학자인 로버트 브레너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현재의 위기의 본질은 ‘금융’이 아니라 ‘실물’ 에서 비롯된 위기라고 하는 논지를 펼쳤네요.

즉 1970년대 부터 지속적으로 감소한 이윤율의 감소가 자본으로 하여금 신자유주의를 시행하게 하여 정부의 복지예산을 줄이고, 노동자들의 임금을 억제해와서 총수요의 감소를 초래해왔고, 이는 필연적으로 공급과잉을 불러오게 되서 발생한 위기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윤율 감소를 자산의 거품을 키우면서 모면해왔는데 이번에 거품이 꺼지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주된 그의 말을 들어보면..


 

사람들이 현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기 상황을 분석하면서 은행과 주식시장의 붕괴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단지 그 지점에서만 맴돌 뿐, 보다 본질적인 측면으로 깊이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미국의 재무장관이었던 헨리 폴슨과 연준 의장인 벤 버냉키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이번 위기가 금융부문의 문제로부터 모두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또 ‘배후’에 있는 실물경제는 견실하다고 강조한다. 이른바 ‘펀더멘탈’(기초체력)은 튼튼하다는 식의 주장말이다. 이런 주장만큼 잘못된 것도 없다. 오늘날 위기의 근본 원인은 지난 1973년 이후, 특히 2000년 이후 선진 자본주의 경제의 활력이 떨어진 데서부터 찾아야 한다. 미국과 서유럽, 일본의 경제적 성과는 지속적으로 악화됐고, 표준적인 거시경제지표들, 그러니까 국내총생산(GDP)이나 투자, 실질임금 같은 것들을 얘기할 수 있을텐데, 이런 지표들은 경기순환때마다 갈수록 나빠졌다. 가장 놀라운 사실이 뭔지 아나? 가장 최근에 끝난 경기순환 국면, 즉 2001년부터 2007년까지의 경기순환 국면이 2차 대전 시기를 통털어 가장 미약했다는 점이다. 이는 이 기간 동안에 미국 정부가 전시를 뺀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로 경기부양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놀라운 일이다.


1973년 이후 세계경제가 장기하강세를 보이는 것은 한마디로 자본이 챙겨갈 수 있는 수익률이 1960년대말부터 지속적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 무렵부터 임금생활자들의 몫인 실질임금의 증가세가 줄곧 눈에 띄게 둔화됐는데도, 이윤율이 이전 시기 수준으로 회복되지 못했다는 점은 특히 더 놀라운 일이다. 이윤율이 떨어진 주된 요인은 뭘까? 물론 유일한 요인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 비밀은 바로 세계경제의 제조업 부문이 과잉설비라는 덫에 빠져든 데 있다. 새로운 제조업 강국들, 예컨대 독일과 일본, 동북아시아의 신흥공업국, 남아시아의 호랑이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중국이라는 거인이 잇따라 세계시장에 진입하지 않았나. 이들 ‘후발 경제’들은 앞선 ‘선발 국가’들이 이전에 생산했던 것과 동일한 재화들을 이제 더욱 싼값에 생산해냈다. 그 결과 여러 산업 부문에서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너무 많아졌고, 이는 제품 가격을 떨어뜨리는 압력 요인으로 작용해 당연히 이윤마저 압박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잊지 말아야할 게 있다.

이윤 압박을 받게 된 기업들은 순순히 자신들의 산업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혁신능력에 기대거나 혹은 신기술에 대한 투자를 가속화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지를 지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로 인해 과잉설비 문제는 되레 악화됐을 뿐이다. 자본가들은 수익률이 떨어진 탓에 투자로부터 더욱 적은 잉여만을 챙겨가게 됐다. 결국 그들은 설비와 투자, 고용 증가세를 둔화시키는 것말고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나마 수익성을 최대한 회복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임금을 동결했고, 정부로 하여금 사회지출을 삭감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이냐? 장기적으로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총수요’ 부족의 문제를 불러왔을 뿐이다. 총수요가 지속적으로 줄어든 것은 결국 경제가 장기적으로 취약하게 된 직접적 원인이다.

논점을 분명하게 잡아야 한다. 만일 신자유주의가 단지 규제 완화와 금융 중심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경제 ‘회복’에 보탬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 그리고 복지국가 시스템에 대해 자본의 공격 강화를 뜻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앞서 말한 이윤율 저하 추세가 더욱 악화되는 것을 어느 정도 저지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게 하나 있다. 이러한 ‘자본의 반격’은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불리는 1980년대 이전에 이미 시작됐다는 점이다. 70년대 초 이윤율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자본은 곧장 반격에 나섰다. 그럼에도 이윤율은 회복되지 않았고 총수요 문제만 더욱 악화시켰다. 이 때 정책 당국자들이 들고 나온 무기가 있다. 더욱 강력하면서도 더욱 위험한 형태의 경기 부양책이었는데, 바로 ‘자산가격 케인즈주의’(asset price Keynesianism)라 불릴만 한 것이다. 자산시장의 거품을 키워 쪼그라든 소비를 회복시키겠다는 게 기본 발상이다. 바로 오늘날의 대재앙을 불러온 싹이다.

현재의 위기는 분명 ‘맑스식 위기’다. 그게 내가 확고하게 갖고 있는 생각이다.



인터뷰 전체 내용은 아래기사에서

관련 기사: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35868.html


혼돈의 기원 상세보기
로버트 &lt;b&gt;브레너&lt;/b&gt; 지음 | 이후 펴냄
1970년대이후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로버트 브레너의 세계경제에 대한 논문집. 세계2차대전 이후부터 미국이 추진한 &#39;케인즈주의&#39;를 비롯해 독일, 일본의 경제를 미국, 독일,...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교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독이다  (4) 2009.02.11
미스 조선  (2) 2009.02.06
침묵의 위안처  (0) 2009.02.04
다수결과 소수의견  (0) 2009.01.21
경제적 공포  (0) 2009.01.17
싸움  (0) 2009.01.14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다수결과 소수의견
인문 | 2009. 1. 21. 18:48

민주주의가 다수결로 결정된다고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토론과 합의이지요. 다수결은 토론과 합의의 결과일 뿐입니다.

다수의 의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할수 있다면 야당은 존재할 필요가 없겠지요. 더군다나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사안을 극히 소수의 국회의원들이 강행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다수결의 원리에도 위배되는 것이지요.

만약 정치가 "법과 공권력"에만 의존한다면 검찰과 경찰이외의 다른 국가기관은 존재의 이유가 없겠지요.

법치주의라는 말은 법으로 국민들을 억누르라는 것이 아니라
법이 아니면 국민들의 권리를 함부로 침해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어제 있었던 용산철거민 사건은 국가권력이 얼마나 잔인하게 국민들을 살해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생생한 사례입니다. 법이라는 이름으로....

철거민들이 아무리 잘못했어도 국가권력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할 만큼의 불법을 저질렀습니까?
내일 조중동의 논조는 이미 정해져 있겠죠. 권력의 폭력은 감추고 철거민과 그 지원자들의 과격폭력시위에 촛점을 옮겨나가겠지요. 가소롭고 뻔하지만 언제나 당하는 것은 힘없고 못가진 서민들 뿐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솔교육 논술, 월간신문 <주니어 플라톤> 어린이 시사툰에서

위 만화는 어린이를 위해서 그려진 만화이지만 중년의 제가 보아도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스 조선  (2) 2009.02.06
침묵의 위안처  (0) 2009.02.04
"현재의 경제위기는 맑스식 위기이다."  (0) 2009.01.30
경제적 공포  (0) 2009.01.17
싸움  (0) 2009.01.14
이스라엘 다윗의 별을 버리고 나치의 문양을 넣으려는가?  (3) 2009.01.12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경제적 공포
인문 | 2009. 1. 17. 23:32

살아갈 권리를 갖기 위해서는 살아남을 수 있는 '자격'이 필요한가?

권력과 재산 그리고 당연하다고 공인된 특권을 소유하고 있는 극히 적은 무리의 소수인들은 이미 자동적으로 이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남을 '자격'을 갖기 위해서는 사회에, 그리고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경제구조에 '유용한'자들임이 증명되어야한다.

'유용하다'는 것은 언제나 '수익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익을 얻기에 유용하다는 뜻이다. 다시말해서 '이용할 만하다'는 뜻이다.

'착취하다'라는 말은 저속한 표현일테니까!

- 경제적 공포 L'horreur économique


경제적 공포 상세보기
비비안느 포레스테 지음 | 동문선 펴냄
이전까지 습관적으로 행해지던 정치,경제에 관한 주장이 안고 있는 위험성을 철저한 증거와 함께 분석 한 프랑스 저자의 저서. 부제 노동의 소멸과 잉여존재.


관련포스트
2008/08/08 - 경제성장을 원한다면 좌파정부를 선택하라
2007/12/29 - 시장경제에서 소비자에게 주권은 있는가?
2007/12/28 - 시장이란 표현은 공정한가?
2008/11/29 - 경제성장과 자본주의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싸움
인문 | 2009. 1. 14. 09:13
절대 싸움을 먼저 시작하지 마라.

그러나 한번 시작한 싸움은 스스로 끝내라.

-영화 체인질링 에서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이스라엘 다윗의 별을 버리고 나치의 문양을 넣으려는가?
인문 | 2009. 1. 12. 10:51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스라엘 국기안에는 다윗의 별이 그려져 있다. 다윗은 부족국가에 불과했던 이스라엘을 최초로 통일국가를 수립하여 왕조를 열었던 인물이다. 당연히 이스라엘 족의 영웅으로 칭송되어 마땅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런 인물의 방패문양이라고 여겨진(실은 전혀 관계가 없는 전설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다윗의 별이 국기안에 들어간 것도 자연스럽게 보인다.

다윗의 별 문양은 역사적으로 유대인들만이 사용한 문양이 아니라고 한다. 여러 민족과 여러 나라에서 사용되어 왔다. 현재 다윗의 별이 유대인의 상징이 된 것은 성서나 〈탈무드〉에 근거를 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것이 유대인의 상징이 된 것은 일부 유대인 공동체들이 사용했던 문양을 19세기에 들어와서 그리스도교의 십자가를 본뜬 유대교의 간결명료한 상징으로 유대인들이 받아들이면서부터다. 결정적으로 나치독일이 유대인의 표지로 다윗의 별 문양을 옷에 표시하게끔 강제하면서 이제 다윗의 별은 유대의 상징뿐만아니라 유대인들의 고난과 희생을 상징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가자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대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학살은 나치의 인종청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에게 저지러진 인류의 양심은 이제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유대인들에 세계 양심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있다고 표현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 사진은 지난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였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학살을 항의하는 시위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시위대는  ‘다윗의 별’ 대신 나치 독일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 문양을 가운데 집어넣은 이스라엘 국기를 불태우고 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학살이 나치 독일의 유대인의 홀로코스트 학살과 다르지 않다는 의미에서 일 것이다.

  이스라엘은 2000년 넘게 나라없이 유랑생활을 해왔다. 그런 민족이 이스라엘이라는 보금자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인류의 양심에 기인한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양심이 배신으로 돌아오는 현 시점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독립국가 유지를 계속 해야 되는지를 인류양심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별을 버리고 나치와 닮아 가려는가? 학살은 당장 중단되어야한다.

관련포스트
     분노의 사진 한장

     평화를 꿈꾸어 보자

      "Save Ghaza"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수결과 소수의견  (0) 2009.01.21
경제적 공포  (0) 2009.01.17
싸움  (0) 2009.01.14
내가 배운 것의 8할은 독학이었다.  (3) 2009.01.10
만화로 보는 사이버모욕죄  (1) 2009.01.05
펌] 아름다운 Big Issue  (0) 2008.12.22

arrow 트랙백 | 댓글



[PREV] [1][2][3][4][5] [NEXT]
관리자  |   글쓰기
BLOG main image
사실은 없고 해석만 있을 뿐이다.
분류 전체보기 (439)
정치 (6)
언론 (32)
즐거운인생 (21)
인문 (130)
보건의료 (11)
인물 (16)
영화 음악 (97)
엑스리브스 (5)
가족 (5)
그림이야기 (73)
shutter chance (16)
apocrypha (1)
축구 (0)
Total :
Today :
Yesterday :
rss
위치로그 : 태그 : 방명록 : 관리자
marcion's Blog is powered by Daum / Designed by plyfly.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