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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초, 오픈데이 행사가 열린 CERN을 방문한 피터 힉스. 당시 그는 LHC에서 힉스 입자가 발견될 것을 90퍼센트 확신한다고 말했다. ⓒcern | 지난 4월 초, 스위스 제네바 인근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는 5만 명 이상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 무리 가운데에는 79살의 노장 물리학자도 섞여있었다. 그의 이름은 피터 힉스. 지금으로부터 44년 전에 일명 신의 입자라고 불리는 힉스 입자를 이론적으로 발견한 바로 그 물리학자이다.
당시 CERN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복잡한 기계인 거대강입자가속기(LHC)가 본격적인 가동을 하기 전 마지막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를 했었다. 이 행사에 참여한 힉스 박사는 “LHC에서 힉스 입자가 발견될 것이라고 90퍼센트 확신한다”면서 “내년 5월 29일 80세 생일을 맞이하기 전에 힉스 입자가 발견되기를 희망한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LHC의 가동을 하루 앞둔 지난 9월 9일, 살아있는 과학자 중 가장 유명한 과학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가 영국의 국영방송 BBC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LHC에서 힉스 입자가 발견되지 않는데 100달러를 걸었다”고 말이다. 호킹 박사는 이 말과 함께 힉스 입자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훨씬 더 신나는 일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힉스 입자를 찾기 위해 우리나라 돈으로 약 10조원이나 들어간 거대 기계 LHC가 힉스 입자를 찾기 못하는데 돈까지 걸면서 그게 더 신나는 일이 될 거라니. 노벨물리학상을 받지 못한 호킹 박사가 힉스 입자를 발견하기만 하면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되는 힉스 박사를 질투하는 것일까? 전 세계인으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물리학자가 이렇게 심술궂은 얘기를 하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 보인다. 호킹 박사는 대체 왜 이런 말을 한 것일까?
힉스의 발견은 표준모형의 완성
이미 앞에서 얘기했듯이, 힉스 입자는 현대 물리학의 최대 난제 중 하나로 표준모형의 마지막 퍼즐이다. 20세기 들어 물리학자들은 우주에 존재하는 4가지 기본 힘인,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을 통합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이 과정에서 중력을 제외하고 나머지 3가지 힘을 통합한 이론인 표준모형이 등장했다. 지금까지 이 이론은 입자물리학의 거의 모든 실험결과를 큰 무리없이 설명해오면서 지난 30-40년 간 현대물리학을 이끌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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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HC가 가동하면서 내보낸 최초 이미지. 이때 힉스 입자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직접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힉스 입자로 인해 생성되는 수많은 입자들을 분석함으로써 힉스 입자의 생성 유무을 알 수 있다. ⓒcern | 그런데 표준모형에 아직 채워지지 않는 퍼즐 조각이 있다. 이 이론에는 물질을 이루는 기본입자들로 쿼크 6개, 전자를 포함한 경입자 6개 그리고 이들의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입자 4개가 있다. 이들 기본입자들은 저마다 다른 질량을 갖는데, 그 이유가 바로 힉스 입자 때문이다. 힉스 입자는 이들 기본입자들에게 질량을 부여하는 입자이다.
하지만 힉스 입자는 표준모형에서 제시하는 기본입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골칫거리이다. 가상의 입자란 얘기이다.
LHC는 바로 힉스 입자를 찾으려는 물리학자들을 위한 거대장치이다. 빛의 속도에 거의 다다른 두 개의 양성자 빔이 서로 충돌함으로써 LHC에서는 표준모형의 마지막 퍼즐인 힉스 입자를 발견하기에 충분한 에너지가 만들어진다. 그 결과, 힉스 입자가 발견된다면 표준모형은 완성이 된다.
그런데 호킹 박사의 얘기대로 LHC에서 힉스 입자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사실 수많은 물리학자들은 호킹 박사처럼 이를 더 기대하고 있다. 많은 물리학자들이 심술쟁이라니, 그건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그들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하다.
사실 많은 물리학자들은 표준모형에 불만이 많다. 표준모형은 물리학자들이 원하는 궁극적인 이론이 아니다. 중력을 포함하지 못했다. 또한 우주에 23퍼센트를 차지하는,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암흑물질에 대해서도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왜 우주에는 물질이 반물질보다 더 많이 존재하는지 비대칭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물리학자들이 찾으려는 또다른 무엇
이처럼 표준모형은 모든 물리현상을 설명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이론일 뿐이다. 그래서 그동안 이론물리학자들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차세대 이론을 만들어왔다. 그것이 바로 초대칭 이론이다. 초대칭 이론은 과연 뭘까?
동양사상에서 음이 있으면 양이 있듯이 물리학자들은 대칭을 좋아한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물질과 대칭을 이루는 반물질을 발견했다.
표준모형도 이런 대칭성을 띠는데, 문제는 이 대칭성을 갖게 되면 표준모형을 구성하는 여러 기본입자들 간의 구분이 사라진다. 하지만 실험으로 밝혀진 바로는 기본입자들은 저마다 다른 질량을 갖고 있고 구분이 확실히 됐다. 그래서 힉스 입자가 등장했다. 힉스는 표준모형의 틀을 깨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해준다.
반면 초대칭 이론은 표준모형에서 다루는 대칭문제를 넘어선 새로운 대칭성으로 이 문제를 풀었다. 그래서 초대칭이라고 한다.
초대칭 이론은 힉스 입자 대신 표준모형의 기본입자들에게 초대칭 짝을 지어주었다. 초대칭 짝은 어려운 물리학 용어로 하면, 표준모형의 기본입자와 물리적인 성질은 같고 스핀이라는 입자의 고유성질 값만 1/2만큼 다르다.
예를 들어 스핀이 1/2인 전자의 초대칭 짝은 스핀이 0인 초전자(selectron)이고 스핀이 1인 광자의 초대칭 짝은 스핀이 1/2인 포티노(photino)이다.
따라서 초대칭 이론이 맞다면 하나의 힉스 입자가 아니라 여러 개의 초대칭 입자가 존재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LHC에서는 힉스 입자가 아니라 여러 개의 초대칭 입자가 발견된다. 지겨운 표준모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물리학자들은 LHC에서 힉스 대신 여러 개의 초대칭 입자를 발견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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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HC에는 이처럼 거대한 검출기가 여러개 있어 힉스 입자나 초대칭 입자를 찾아낸다. ⓒcern | 초대칭 입자가 발견되면 초대칭 이론이라는 새로운 물리학의 세계가 열린다. 이것의 의미는 상당하다. 물리학자들이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만물의 법칙' 후보 1순위인 초끈이론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물리학자들이 40년 넘게 그들을 괴롭혀온 지겨운 힉스 보다 신선한 초대칭 입자의 발견에 더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호킹 박사도 바로 이 때문에 힉스 입자가 발견되지 않으면 더 신나는 일이 될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예상대로라면 힉스 입자는 LHC에서도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LHC에서 힉스 입자를 발견했다고 확정하는데는 최소 1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고 한다. 반면 초대칭 입자는, 존재하기만 한다면, 일부는 LHC에서 많이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에 힉스보다 더 빨리 데이터가 나올 수 있다. 어쩌면 초대칭 입자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조만간 들려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힉스도 초대칭 입자도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론물리학자들에겐 그 자체 또한 흥미로운 일이다. 이제까지 세운 이론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야 하며, 이때 현대물리학의 이론에 바탕이 되는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에 대해서도 보다 더 깊이 들춰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험물리학자들에겐 죽을 맛이다. 어떤 결과도 없다면 차세대 가속기로 계획되어있는 70억 달러 규모의 국제선형가속기(International Linear Collider, ILC)에 대한 재원을 조달하기가 힘들어진다.
일부 이론물리학자들은 이보다 더 나쁜 일이 단지 힉스입자만 보고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이론물리학자들은 표준모형에 갇히고 만다. 표준모형을 넘어선 새로운 물리학을 갈망하는 이들은 이에 대한 어떤 단서도 얻지 못하고 일이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LHC가 가동에 들어간 지 2주도 안 되서 벌써 고장이 났다. 고치는데 앞으로 2달 정도 걸리기 때문에 LHC에서 들려올 소식은 또다시 연기되었다. 올해는 아무래도 그냥 지나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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