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이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러니 시장을 가만 놔둬라.’ 하이에크식 신자유주의의 핵심이다. 폴라니는 그 반대편에 선다. ‘시장을 사회의 지배 아래 둬라.’ 이 점에서 마르크스·케인스와 구분된다. 마르크스는 ‘시장의 철폐’를 요구했고, 케인스는 ‘시장에 대한 국가의 (재정) 개입’을 주장했다. 마르크스처럼 시장을 부정하진 않고, 케인스처럼 재정 개입이 해법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폴라니는 시장의 존재를 인정하되, 그것을 사회의 지배 아래에 둘 것을 요청했다.
폴라니가 보기에 어떤 경우에도 ‘상품화’시키면 안 될 것이 세 가지 있다. 노동·자연·화폐다. 재화를 교환하는 시장은 필요하다. 그러나 노동·자연·화폐를 시장에서 ‘자유방임’으로 거래하면 곧바로 재앙이 시작된다. 노동은 인간의 다른 이름이다. 인간은 상품 가치와 경제적 이익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존재다. 토지를 비롯한 자연도 인간이 생산할 수 없다. 시장에서 버려지거나 낭비되면 복구할 수도 없다. 화폐는 구매력의 징표일 뿐이다. ‘생산’되지 않는다. 개인이 뜻한 대로 늘리고 줄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또는 세계 금융 체제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인간·자연을 상품화한 뒤에 화폐까지 사고팔 수 있다는 환상을 심은 게 바로 ‘시장자유’, 즉 ‘자기 조정 시장’의 결정적 폐해라고 폴라니는 생각한다.
시장자유는 인류 문명 전체를 위기로 몰고 간다. 노동자·농민은 물론 생산기업까지도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신화의 피해자다. 금융시장에서 화폐가 거래되는 방식 때문에 생산기업은 주기적으로 파산될 수밖에 없다. 그 기업이 만들어내는 재화가 아무리 가치 있는 것이라 해도 그렇다. 자유시장 경제체제에서는 일하는 사람, 기업하는 사람 모두 항상적인 빈곤과 불안에 시달린다.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내버려만 두면 인류의 자유가 증대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완전히 거짓말이라고 폴라니는 지적한다. 실제로는 그 반대의 일이 거듭되고 있다. 오히려 인류의 자유가 시장에 의해 억압받고 있다.
폴라니는 국가의 개입을 해결책으로 내놓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국가)사회주의나 파시즘을 싫어했다. 시장을 사회로부터 떼내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를 떼내 절대화하는 것을 폴라니는 용납할 수 없었다. 두 방식 모두 인간 사회를 황폐화하는 것은 똑같다고 여겼다. 굳이 표현하자면 폴라니는 국가 대신 ‘사회의 개입’을 내세운다.
원래부터 경제는 인간 사회의 한 부분이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마치 정치와 문화가 사회의 한 부분인 것처럼, 경제 역시 사회적 합의 구조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경제는 사회 구성원의 소통·도움·합의 등에 의해 얼마든지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사회’란 요즘의 개념으로는 ‘시민사회’와 비슷하다. 노동자·농민·시민·생산기업가 등을 두루 아우르는 개념이다.
이들의 경제 문제를 ‘사회적으로’ 푸는 세 가지 방식을 폴라니는 제시한다. 공동체·협동조합을 통한 상호부조, 시장을 통한 재화의 교환, 국가를 통한 사회적 서비스 제공 등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가운데 어느 하나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폴라니는 세 요소의 ‘공존’에 무게를 실었다. 다만 시장자유주의에서 결여된 것이 상호부조와 사회적 서비스 제공이므로, 두 요소의 ‘복원’이 좀더 중요하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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