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전파도 마르크스주의도 자본을 생산요소로 규정했는데, 베블런은 이런 규정을 기각하고 자본을 사회적 권력의 한 형태로 보았다.
베블런은 자본이 생산요소라는 주장, 다시 말해 자본가가 자본을 투여해 더 많은 부를 창출한다는 주장은 신화적 허구라고 말한다. 생산성의 진정한 원천은 지식이다. 이때의 지식은 사회 공동체가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해온 모든 경험과 기술, 발명과 발견의 총체다. 이 총체적인 사회적 지식이 생산성의 진정한 원천이다. 사회의 총체적 지식은 공장이나 기계와 같은 특정 사물로 체현되는데, 바로 이 사물을 자기 것으로 전유한 자본가들이 이 사물을 부르는 이름이 자본이다. 그러므로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보자면, 자본은 생산의 요소가 아니라 생산의 영역에서 발휘되는 자본가의 권력일 뿐이다. 그 권력의 바탕이 바로 소유권이다. 이 소유권은 ‘무언가를 사용할 권리’가 아니라 ‘무언가를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게 할 권리’다. 자본가가 이 소유권을 근거로 삼아 공동체 전체의 지식을 ‘볼모’로 잡은 뒤 사회 전체로부터 ‘몸값’을 뜯어내는데, 그것이 이윤이라고 베블런은 말한다.
체인질링은 서양의 오래된 용어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요정이 아이들을 데려간 후에 작고 못생긴 아이나 동물을 놓고 가는데 이때 생긴말이 바로 체인질링이라고 하네요. 즉 영화제목이 "바꿔친 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론가 김소영은 흥미로운 분석을 했군요. 안젤리나가 분한 크리스틴이 1920년대 모던걸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크리스틴은 전화국에서 당당하게 전문가로서 인정받는 싱글맘으로 그려져 있는데 영화에서 부패경찰이 크리스틴을 "차갑고, 무관심하며, 감정적이고,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고 청문회에서의 증언은 실은 당대의 남성들이 모던여성들에 대한 경멸조의 말투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 입니다.
체인질링 아이바꿔치기는 다른 유괴영화와 달리 아이의 실종만이 아니라 그 실종이 이야기하는 법적질서, 아이를 잃은 모성에 가해지는 위협, 모던걸에 대한 사회적 통념들을 동시에 점진적으로 드러내듯 다루면서 기존 영화들을 뛰어 넘는다.
씨네21 690권 김소영의 글중에서
제가 영화를 보는 중에 기억에 남는 장면은 크리스틴이 경찰들에 의해서 강제로 정신병원을 입원했을때 그를 도와주던 여성의 말이다. 크리스틴은 의사가 자신을 진단해보면 자신이 정상적인 여성이라는 것이 드러날 것이라고 자신하는데 그 여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정말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는 대사들입니다. 마치 미셀푸코를 읽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푸코에 따르면 비정상이라는 것은 정상인들이 자신의 정상성을 보장받기 위하여 자신과 다른 자들을 비이성적이고위험한 존재로 규정짓는 단어이고, 정상적인 것은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입증할 아무런 증거를 자신 안에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정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외부에 비정상적인 것을 설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영화는 미셀푸코가 말한 권력과 광기, 정상과 비정상, 정신병원내에서 의사의 권위와 권력등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공통의 언어가 없다. ...... 18세기 말에 광기를 정신병으로 규정한 이래 미친 사람과의 대화는 단절되고, 정상인과의 분리는 기정사실화했으며, 전에 광기와 이성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대화는 ...... 완전히 망각 속에 묻히게 되었다. 정신과 의사의 언어는 광기에 대한 이성의 독백일 뿐, 그런 침묵 위에서 진정한 언어는 형성 될수 없다. 나는 이 언어의 역사를 쓰려는 것이 아니라 이 침묵의 고고학을 쓰려는 것이다.
정신병원은 관찰,진단, 치료의 자유스러운 구역이 아니다. 그것은 환자가 고발되고 재판받고 선고받는 사법적인 장소이며, 거기서 풀려나기 위해서는 깊은 심리하적 영역에서의 소송 절차, 즉 회개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광기는 비록 밖에서는 무죄였더라도 수용소 안에서는 처벌의 대상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적어도 오늘날까지도 도덕적 세계의 수인으로 남아있다.
또한 영화는 공권력이 자신들의 실수나 야만, 범죄행위를 감추기 위해 얼마나 증거를 조작하고, 소시민들에게 협박을 가하는 지를 여실히 보여 주어서 2009년 한국사회의 공권력의 추악함과도 비교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의 19세기 초반과 한국의 21세기가 닮았다는 것은 비극이기도 하고 코미디이기 하지요.
오른쪽 분이 미스조선으로 뽑히신 분 같은데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손색 없을 정도의 미모입니다. 자그마한 두상에 또렷한 이목구비등...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면 북한 미녀같기도 합니다. 트로피를 준 것도 눈에 띄는 군요.
그래서 미스조선에 대해서 더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1931년 10월 22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미스조선선발대회 내용이 실렸는데 흥미로운 내용이 많군요.
미스 조선 두 여인, 대판매일(大阪每日新聞) 주최
대판매일신문사 주최의 [미스 조선] 모집은 용모 여인(麗人) 조선인측 47명, 내지인측 178명 합계 225명의 다수에 달하여 실로 백화경영의 비경을 연출하였는데 내선명사 22명, 심사원이 십오만 사천 사백 육십 칠 매라는 투표 속에서 엄정히 심사한 결과는 마침내 조선인측과 내지인측에서 아래와 같은 두 여인이 최고의 득표로 '미스 조선'에 당선되었다.
(사진은 당선된 두 여인 이명숙(상) 양과 키쿠치 이치꼬(하) 양)
▲ 조선인측 ㅡ 경성부 이명숙, 방년 18세, 신장 5척 2촌, 체중 13관, 경성여자상업 출신, 직업여성, 득표 일만 1만 5천 7백 64표
▲ 내지인측 ㅡ 인천부 키쿠치 이치꼬, 방년 20세, 신장 5척, 체중 12관 7백근, 인천고녀 출신, 득표 2만 5천 3백 80표
대판(大阪)이라면 오사카를 말하는 것인데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대판매일신문)에서 개최하고, 조선총독부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실린 내용입니다.
일본 오사카에 있는 신문사가 조선에서 미인선발대회를 개최한 것도 특이하고(물론 식민지시절이었으니까 가능하겠지만) 조선인과 일본인이 참석해서 각각 1인식 뽑은 것도 특이합니다. 무엇보다 더 믿을 수 없는 것이 15만4천명이 넘는 투표인원이 참석했다는 것은 더 더욱 믿기 힘들군요. 당시에도 미디어 영향력이 상당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궁금한 것이 조선최초의 미인선발대회는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해방후 첫 미인대회는 공식적으로는 (미스코리아주최측에 따르면) 1957년 5월에 열렸다고 합니다. 박현옥이라는 분이 진에 당선되셨다는데...
제1대 미스코리아 박현옥
그런데 미인대회 야사가 많고 뚜렷한 역사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국 최초의 미인대회는? 미스 코리아1호 강귀희라는 글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미인선발 대회의 성격을 띠기 시작한 시기는 1953년 5월의 제1회 여성경염대회때부터였다."라고 주장합니다. 미스코리아주최측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링크된 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조그마한 미인대회는 일제시대나 해방후나 많이 열린 모양입니다.
1953년에 선발된 강귀희씨
해방후의 역사도 이렇게 부정확한데 일제강점기시절의 역사야 더 말할 나위 없겠죠. 좀더 살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도 이런 미시사(微視史)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학계에서 연구를 해주었으면 합니다. 미인선발대회야말로 우리나라가 근대라는 시대를 만난 지점을 대변하는 사안이고 식민지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소재이고, 서구문명과 만나는 이벤트로서의 역사에 중요한 시사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미스코리아대회가 여성들을 성품화한다고 해서 부정적인 여론때문에 명성이 옛날만 못하죠. 미스코리아에 뽑히면 부와 명성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었던 시절은 이제 과거가 되어버렸습니다.
개인적으로 미인선발대회에 대해서 부정적이지만 이 대회가 중단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당대의 여성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평가해왔는가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지침이 되기도 하고 그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고 하자, 그녀는 몸을 뺏다. '그전에 먼저 내게 책을 읽어줘야 해' 책읽어주기, 샤워, 사랑행위 그리고 나서 잠시 누워있기- 이 것이 우리 만남의 의식이 되었다.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자 나는 황혼속에서 그녀와 더 머물고 싶어서 더 오랫동안 책을 읽었다.
미국 컬럼비아주립대UCLA 교수이자 맑스주의 역사학자인 로버트 브레너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현재의 위기의 본질은 ‘금융’이 아니라 ‘실물’ 에서 비롯된 위기라고 하는 논지를 펼쳤네요.
즉 1970년대 부터 지속적으로 감소한 이윤율의 감소가 자본으로 하여금 신자유주의를 시행하게 하여 정부의 복지예산을 줄이고, 노동자들의 임금을 억제해와서 총수요의 감소를 초래해왔고, 이는 필연적으로 공급과잉을 불러오게 되서 발생한 위기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윤율 감소를 자산의 거품을 키우면서 모면해왔는데 이번에 거품이 꺼지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주된 그의 말을 들어보면..
사람들이 현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기 상황을 분석하면서 은행과 주식시장의 붕괴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단지 그 지점에서만 맴돌 뿐, 보다 본질적인 측면으로 깊이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미국의 재무장관이었던 헨리 폴슨과 연준 의장인 벤 버냉키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이번 위기가 금융부문의 문제로부터 모두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또 ‘배후’에 있는 실물경제는 견실하다고 강조한다. 이른바 ‘펀더멘탈’(기초체력)은 튼튼하다는 식의 주장말이다. 이런 주장만큼 잘못된 것도 없다. 오늘날 위기의 근본 원인은 지난 1973년 이후, 특히 2000년 이후 선진 자본주의 경제의 활력이 떨어진 데서부터 찾아야 한다. 미국과 서유럽, 일본의 경제적 성과는 지속적으로 악화됐고, 표준적인 거시경제지표들, 그러니까 국내총생산(GDP)이나 투자, 실질임금 같은 것들을 얘기할 수 있을텐데, 이런 지표들은 경기순환때마다 갈수록 나빠졌다. 가장 놀라운 사실이 뭔지 아나? 가장 최근에 끝난 경기순환 국면, 즉 2001년부터 2007년까지의 경기순환 국면이 2차 대전 시기를 통털어 가장 미약했다는 점이다. 이는 이 기간 동안에 미국 정부가 전시를 뺀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로 경기부양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놀라운 일이다.
1973년 이후 세계경제가 장기하강세를 보이는 것은 한마디로 자본이 챙겨갈 수 있는 수익률이 1960년대말부터 지속적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 무렵부터 임금생활자들의 몫인 실질임금의 증가세가 줄곧 눈에 띄게 둔화됐는데도, 이윤율이 이전 시기 수준으로 회복되지 못했다는 점은 특히 더 놀라운 일이다. 이윤율이 떨어진 주된 요인은 뭘까? 물론 유일한 요인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 비밀은 바로 세계경제의 제조업 부문이 과잉설비라는 덫에 빠져든 데 있다. 새로운 제조업 강국들, 예컨대 독일과 일본, 동북아시아의 신흥공업국, 남아시아의 호랑이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중국이라는 거인이 잇따라 세계시장에 진입하지 않았나. 이들 ‘후발 경제’들은 앞선 ‘선발 국가’들이 이전에 생산했던 것과 동일한 재화들을 이제 더욱 싼값에 생산해냈다. 그 결과 여러 산업 부문에서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너무 많아졌고, 이는 제품 가격을 떨어뜨리는 압력 요인으로 작용해 당연히 이윤마저 압박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잊지 말아야할 게 있다.
이윤 압박을 받게 된 기업들은 순순히 자신들의 산업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혁신능력에 기대거나 혹은 신기술에 대한 투자를 가속화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지를 지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로 인해 과잉설비 문제는 되레 악화됐을 뿐이다. 자본가들은 수익률이 떨어진 탓에 투자로부터 더욱 적은 잉여만을 챙겨가게 됐다. 결국 그들은 설비와 투자, 고용 증가세를 둔화시키는 것말고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나마 수익성을 최대한 회복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임금을 동결했고, 정부로 하여금 사회지출을 삭감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이냐? 장기적으로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총수요’ 부족의 문제를 불러왔을 뿐이다. 총수요가 지속적으로 줄어든 것은 결국 경제가 장기적으로 취약하게 된 직접적 원인이다.
논점을 분명하게 잡아야 한다. 만일 신자유주의가 단지 규제 완화와 금융 중심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경제 ‘회복’에 보탬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 그리고 복지국가 시스템에 대해 자본의 공격 강화를 뜻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앞서 말한 이윤율 저하 추세가 더욱 악화되는 것을 어느 정도 저지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게 하나 있다. 이러한 ‘자본의 반격’은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불리는 1980년대 이전에 이미 시작됐다는 점이다. 70년대 초 이윤율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자본은 곧장 반격에 나섰다. 그럼에도 이윤율은 회복되지 않았고 총수요 문제만 더욱 악화시켰다. 이 때 정책 당국자들이 들고 나온 무기가 있다. 더욱 강력하면서도 더욱 위험한 형태의 경기 부양책이었는데, 바로 ‘자산가격 케인즈주의’(asset price Keynesianism)라 불릴만 한 것이다. 자산시장의 거품을 키워 쪼그라든 소비를 회복시키겠다는 게 기본 발상이다. 바로 오늘날의 대재앙을 불러온 싹이다.
<한겨레>가 30일 보건복지가족부의 ‘2007년 전국 248개 시·군·구별 연령표준화 암사망자 통계’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전국 시·군·구 248곳 가운데 56.7%인 140곳의 암사망률이 평균보다 높았다. 암사망률이 가장 높은 곳은 경북 영양(175.4명)이었고, 가장 낮은 곳은 강원 화천(84.5명)이었다. 2007년 인구 10만명당 암사망률 평균은 127.4명이었다.
<한겨레>는 한국교원대 김영훈 교수(지리교육학)의 도움으로 ‘전국 시·군·구별 암사망률 지도’를 만들어 보았다. 지리정보시스템(GIS)을 이용해 전국의 암사망률 편차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만든 이 지도는 암사망률이 전국 평균보다 높을 경우 붉은색으로, 암사망률이 전국 평균보다 낮을 경우 파란색으로 표시했다. 특히 암사망률이 높은 지역의 경우 편차를 5단계로 나눠 사망률이 높을수록 색깔을 짙게 했다. 다만 낮은 경우는 복잡함을 피하기 위해 농담을 표시하지 않았다.
쓰촨(四川)의 화가 리좡핑(李壮平) 씨와 그의 친딸인 리친(李勤) 양이 공동으로 제작한 유화작품 '동방신녀산귀 시리즈(东方神女山鬼系列)'에 나오는 나체 모델이 리 화가의 친딸인 것으로 밝혀져 사회적으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사회적 논란에도 리씨 부녀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견해를 밝혔는데, 나체모델을 한 리친 양은 "예전부터 주변 사람들이 몸매가 아름다워 모델을 해보라는 권유에 용기가 없어 망설이다 믿을 수 있는 아버지의 유화작품에서만 나체모델을 하기로 결정했다."며 "아버지의 예술에 몸을 바치는 것을 아주 성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아버지 리씨는 "이번 작품의 동방신녀에 딸의 모습이 근사하여 부인과 딸의 동의를 거친 후에 창작을 했으며 예술로써 생각을 했지 윤리적인 부분은 고려해보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우리들이 흔히 누드를 대할때에는 가상의 연인을 대하듯 하는데 만약 친딸의 누드를 보고 있다고 연상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치심을 느끼게 되겠죠.
화가에게 작품을 하면서 윤리를 강조한 것은 우스운 일이지요.
인상파화가 마네는 올랭피아에서 창녀를 그려서 윤리논쟁에 휘말리면서 매도 당했던 역사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당시 파리지앵들은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에곤 쉴레는 미성년자의 누드를 그렸고, 청소년을 성추행했다는 혐의로 감옥에 간 적이 있습니다.
리죙핑의 작품이 그런 의미에서 미술사에 의미있는 사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의 작품을 보니 그림 그 자체는 별로중에 별로더군요. 나니아 연대기도 아니고...
작품성에 관계없이 여러분도 그의 작품을 보면서 자기 딸의 누드를 보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요. 모멸감을 느끼셨다면 어쩌면 화가의 의도가 성공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인터뷰내용을 보면 화가의 의도가 그 것은 아니었던 같긴 하지만..
조훈의 부조작업를 정면이라는 단일 시점에서 보게 되면 관람자는 이러한 부조 자체의 본질로 인해, 몸짓이 내포하는 모든 의미, 즉 형태의 모든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는 일종의 전능함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전능함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관람자가 부조를 보기 위해서는 그 앞에 서야만 한다. 이는 부조의 ‘정면성’이 지닌 시선의 폭력성과도 관련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말하듯, 부조에서 중요한 것은 관람자가 실제로 조각의 주위를 돌아보지 않더라도 그는 그 형태를 한 바퀴 돌면서 볼 때 얻을 수 있는 만큼의 정보를 갖는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더 많은 정보를 얻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한번의 지각작용에 의해서 덩어리들의 전개양상과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를 모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데 조훈의 작업에서 관객이 느끼는 전지전능함이란 곧 부조가 갖는 시선의 정면성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다수의 의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할수 있다면 야당은 존재할 필요가 없겠지요. 더군다나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사안을 극히 소수의 국회의원들이 강행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다수결의 원리에도 위배되는 것이지요.
만약 정치가 "법과 공권력"에만 의존한다면 검찰과 경찰이외의 다른 국가기관은 존재의 이유가 없겠지요.
법치주의라는 말은 법으로 국민들을 억누르라는 것이 아니라 법이 아니면 국민들의 권리를 함부로 침해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어제 있었던 용산철거민 사건은 국가권력이 얼마나 잔인하게 국민들을 살해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생생한 사례입니다. 법이라는 이름으로....
철거민들이 아무리 잘못했어도 국가권력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할 만큼의 불법을 저질렀습니까? 내일 조중동의 논조는 이미 정해져 있겠죠. 권력의 폭력은 감추고 철거민과 그 지원자들의 과격폭력시위에 촛점을 옮겨나가겠지요. 가소롭고 뻔하지만 언제나 당하는 것은 힘없고 못가진 서민들 뿐입니다.
한솔교육 논술, 월간신문 <주니어 플라톤> 어린이 시사툰에서
위 만화는 어린이를 위해서 그려진 만화이지만 중년의 제가 보아도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권력과 재산 그리고 당연하다고 공인된 특권을 소유하고 있는 극히 적은 무리의 소수인들은 이미 자동적으로 이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남을 '자격'을 갖기 위해서는 사회에, 그리고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경제구조에 '유용한'자들임이 증명되어야한다.
'유용하다'는 것은 언제나 '수익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익을 얻기에 유용하다는 뜻이다. 다시말해서 '이용할 만하다'는 뜻이다.
보신각타종때 KBS가 정부를 비판하는 시위대의 음성을 지우고, 인위적으로 관중의 박수를 넣어서 방송하는 것을 두고 "화면의 사실이 현장의 진실과 다를 수 있다"라고 멘트를 해서 유명한 신경민앵커가 이번 뿐만아니라 언론의 역할에 대해서 명멘트를 많이 했었군요.
대표적인 것이 2007년 12월 대선을 며칠앞두고 발생한 강화총기탈취사건때 사망한 군인에 대한 소식을 전하면서 라디오뉴스 말미에 한 멘트입니다.
다시 들어봐도 명언이네요.
작지만 중요한 일을 한가지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선진국에서 군인 소방관 경찰이 숨젓을 경우 브리핑 하는 관료는 직계가족에게 알리기 전까지 신원을 공개할수 없다는 것을 흔히 듣습니다.어제 저녁 강화도 총기 탈취 사건에서 부상을 당했다가 밤 10시 40분 숨졌습니다. 40대 아버지와 어머니는 멀리 대구에서 올라오느라고 새벽 1시 30분에야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부모는 그사이 차안에서 라디오 뉴스에서 보름전 휴가때 봤던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둡고 불안한 차안에서 20살 아들의 아들의 이름과 사망 소식을 듣는다면 그때 심정과 절망감을 어떻게 설명할수 있을까요 만약에 이 때문에 부모에게 사고가 날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성숙한 관행이 자리잡고 충분한 배려를 할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안젤리나 졸리에 대한 기사에서 그녀는 다른 여자배우들과 비교되는 일은 거의 없다. 졸리의 커리어는 오히려 알 파치노, 잭 니콜슨 과 함께 설명된다.
나도 졸리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아니 더 나아가 모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묘한 매력이 있어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있다.
여성들에게는 보이시하면서도 섹시한 매력을 지닌 마법을 지닌 여성으로서 남성들에게는 그녀에게 육체와 영혼이 파멸되어 보았으면 하는 팜므파탈적인 강한 매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여성판 인디아나 존스였던 "툼레이더"에서 그녀를 본후 난 그녀의 포로가 되었다. 헐리우드에서 에어리언의 시고니 위버이후의 가장 강력한 여전사된 그녀는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원티드"에서 이런 이미지를 이어간다. 그녀가 실물로 등장하지 않지만 "베오울프"에서 수많은 영웅들이 자신의 혼과 생명이 파괴될 줄 알면서도 또다시 그녀에게 홀리는 장면들은 졸리가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설정이었을 것이다.
브란젤리나라고 불리우는 안젤리나 졸리는 타블로이드 언론에서 가장 각광받는 스타이다. 하지만 이런 가십들이 그녀의 연기와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까지 파괴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그녀는 툼레이더를 찍으면서 캄보디아, 시에라리온, 탄자니아등에서 국제난민문제를 마주하게 되었고 그녀는 "삶 전체를 바꾸게" 되었고 "이젠 돈을 버는 목표를 발견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가 감독한 체인질링에서 자식이 실종되고 사건을 은폐하려는 경찰과 주정부권력에 맞서 싸우는 강인한 어머니상을 연기한다고 한다.
The Magpie on the Gallows, Pieter Bruegel , 1568, 46x50cm
블러그에서 연재하고 있는 오늘의 미술 에서 처음으로 20세기 이전의 그림을 다룬다. 오늘의 미술 은 현대미술작품이나 작가를 내 나름데로 감상을 자유롭게 적어 나가는데 이번에는 시대를 많이 뒤돌아서서 16세기 작품을 다루는 것이다.
그 작품이 바로 피터르 브뤼겔 Pieter Bruegel의 "교수대위의 까치 The Magpie on the Gallows" 이다.
네덜란드의 풍속화가인 브뤼겔의 작품은 다수의 농민들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인데 위 그림도 여는 작품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농민들이 술마시고 춤추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브뤼겔 특유의 풍자와 비유가 그림에 숨겨져 있다.
그림의 한가운데에는 우리눈에는 생소한 교수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교수대 위에는 까치 한마리가 춤추는 농민들을 바라보고 있다. 농민들은 남녀가 손잡고 춤을 추고 있으며 한쪽에서는 발을 구르면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 오른쪽 아래 부분의 한 남자는 바지를 내리고 큰일을 보고있다.
교수대와 교수대 아래쪽에 무덤의 십자가 없으면 그저 즐거운 그림처럼 보인다.
이 그림의 핵심주제가 작품의 제목처럼 바로 까치에게 있다.
까치가 우리나라에서 길조로 여겨지지만 유럽에서는 흉조로 여겨진다. 까치가 흉조로 여겨지는 이유는 그 생김새 때문이다. 흑과 백이 섞여있는 까치는 "죽음과 삶"의 이중성을 뜻한다. 때문에 "위선"을 상징하기도 하고 인간의 모습을 한 마녀를 뜻하기도 한다. 잡식성인 까치는 곡식을 먹어치우기 때문에 "도둑"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또한 시끄럽게 우는 까치를 "수다쟁이"나 "밀고쟁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니 까치에게 온갖 안좋은 것은 몽땅 갖다 붙혔다고 과언이 아니다.
이런 까치가 교수대위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노래를 하고 있다.
"무서운 그림"의 저자인 나카노 교코 는 그런 의미에서 이 그림을 보면서 밀고가 횡행했던 중세마녀사냥시대를 생각하며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게 하는 그림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나는 위 그림을 보면서 "삶과 죽음"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항상 바로 곁에 있었던 중세 네덜란드 민중들의 낙관성을 읽는다.
굳이 무덤가와 교수대주변에서 춤추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태연하게 교수대 옆에서 똥을 누고 있는 사내를 봐라! 죽음을 낙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야 가능이나 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대위의 까치는 불길한 것만은 틀림없다. 죽음을 부르고 있는 까치의 모습을 보면서...
이스라엘 국기안에는 다윗의 별이 그려져 있다. 다윗은 부족국가에 불과했던 이스라엘을 최초로 통일국가를 수립하여 왕조를 열었던 인물이다. 당연히 이스라엘 족의 영웅으로 칭송되어 마땅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런 인물의 방패문양이라고 여겨진(실은 전혀 관계가 없는 전설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다윗의 별이 국기안에 들어간 것도 자연스럽게 보인다.
다윗의 별 문양은 역사적으로 유대인들만이 사용한 문양이 아니라고 한다. 여러 민족과 여러 나라에서 사용되어 왔다. 현재 다윗의 별이 유대인의 상징이 된 것은 성서나 〈탈무드〉에 근거를 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것이 유대인의 상징이 된 것은 일부 유대인 공동체들이 사용했던 문양을 19세기에 들어와서 그리스도교의 십자가를 본뜬 유대교의 간결명료한 상징으로 유대인들이 받아들이면서부터다. 결정적으로 나치독일이 유대인의 표지로 다윗의 별 문양을 옷에 표시하게끔 강제하면서 이제 다윗의 별은 유대의 상징뿐만아니라 유대인들의 고난과 희생을 상징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가자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대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학살은 나치의 인종청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에게 저지러진 인류의 양심은 이제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유대인들에 세계 양심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있다고 표현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위 사진은 지난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였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학살을 항의하는 시위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시위대는 ‘다윗의 별’ 대신 나치 독일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 문양을 가운데 집어넣은 이스라엘 국기를 불태우고 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학살이 나치 독일의 유대인의 홀로코스트 학살과 다르지 않다는 의미에서 일 것이다.
이스라엘은 2000년 넘게 나라없이 유랑생활을 해왔다. 그런 민족이 이스라엘이라는 보금자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인류의 양심에 기인한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양심이 배신으로 돌아오는 현 시점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독립국가 유지를 계속 해야 되는지를 인류양심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스승이 학생보다 지적 능력에서 우월하다고 전제하고서, 우월한 스승이 열등한 학생을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관념으로는 영원히 불평등을 벗어날 수 없다. 랑시에르는 불평등을 출발점으로, 평등을 목표로 삼는 사고방식을 전복시켜야 한다고 제안한다. “우리의 문제는 지적 능력이 평등하다고 가정함으로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다.” 스승과 학생 사이의 나눔·분할을 거부하고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를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식한 자가 지도하고 무지한 자는 지도를 받는다는 발상을 극복할 토대가 마련된다. 모르는 자가 모르는 자를 가르칠 수 있으며, 모르는 자가 스스로를 가르칠 수 있다. 이런 지적 능력의 평등은 기존 질서의 위계와 자리를 무효로 만들 수 있다. 지배의 작동 조건인 나눔과 분할의 선이 지워지는 것이다.
내가 블러그에서 쓰고 있는 정치, 예술, 언론, 문학, 인문, 종교에 관한 글들 모두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다. 아마 여러분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래서 나의 지식의 8할이상이 독학이었다.
미네르바로 추정되는 사람이 공고와 전문대 졸업이라면서, 중앙일보같은 쓰레기는 "가짜에 놀아난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의 1면 머릿기사를 실었다.
학력이 낮으면 거짓이고 가짜인가? 정작 중요한 것은 학력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능력에 있다. 랑시에르는 이런 능력이 평등하게 타고났다고 말한것이다.
사실 가장 부끄러워할 집단은 바로 그들이다. 그 잘난 학벌과 권력을 갖고도, 분석·전망·대책이 얼마나 엉터리였으면, 일반 대중이 미네르바에게서 대안을 찾고자 열광했을까. 그의 못난 학벌은 오히려 그늘에 묻혀 썩어가는 인재들의 존재와, 그 잘난 학벌에 가려진 권력집단의 탐욕과 무능을 고발한 셈이다.
기자라고 하는 자들도 자신들이 무심코 뱉어내는 기사의 8할 이상이 학교에서 배우지 않고 스스로의 독학에 의해서 배웠을 것이다.
"A few months ago, I got a phone call from a senior Bank of Korea official because I expressed worries about the foreign exchange reserves in a local newspaper," an economist at a local brokerage told Reuters, asking not to be identified.
"The official said that I would be responsible for a (potential) crisis if media keep reporting negative views.."
정부와 한국은행에서 경제학자들에게 언론에게 경제에 관련한 부정적인 코멘트를 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는 내용입니다.
아예 정부에 비판적인 언급을 하지 말아달라는 요청인데 참으로 황당한 상황이죠. 기사 분류를 Oddly Enough 로 분류 했더군요. 기괴한 사건이라는 것이죠.
외국의 투자자 입장에서는 더욱 더 한국상황을 믿지 못하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