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는 것은 말하라. 해야 할 것은 반드시 하라. 가능성 있는 것에는 항상 도전하라. Say what you know, do what you must, come what may.
- Sofia Vasilyevna Kovalevskaya 소피아 코발레프스카야 -
코발레프스카야에 관한 정보는 아래에..
코발레프스카야
▲ 소피아 코발레프스카야. ⓒ
"It is impossible to be a mathematician without being a poet in soul."
"영혼 속에서 시를 노래하지 않고서는 (위대한) 수학자가 될 수 없다." -코발레프스카야(1850~1891): 러시아 출신의 수학자, 물리학자, 시인, 소설가-
수학을 예술로 승화시킨 소피아 코발레프스카야(Sofia Vasilyevna Kovalevskaya). 그녀는 수학 속에서 영혼을 노래한 시인으로 근세 유럽이 배출한 천재 여성 수학자입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그녀에게 ‘영혼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수학자’라는 별칭을 지어 주었습니다. 소개하는 짧은 명언이 그 전부를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코발레프스카야의 대단한 업적을 대표하는 말이 있습니다. "She is famous mathematician and writer who made a valuable contribution to the theory of partial differential equations. … She was the first woman in modern Europe to gain a doctorate in mathematics, the first to join the editorial board of scientific journal, and the first to be appointed professor of mathematics."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그녀는 유명한 수학자이며 소설가로 편미분방정식 이론에 지대한 공로를 남겼다. … 그녀는 근대 유럽시대에 수학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처음 받은 여성이다. 과학저널 첫 여성 편집위원이었고 수학교수로 임명된 첫 여성이다." 대단한 여성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릴 때는 소피아 대신 소냐라고 불리었습니다. 1850년 1월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그녀의 아버지는 한때 러시아 황제 친위대 장군을 지냈던 인물로 집안은 유복했지만 가정은 엄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수학에 재능을 보인 소냐는 가정교사를 통해 집안에서 교육을 받았고 수학을 더 공부하고 싶었으나 대학은 진학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러시아에서는 여성에게 대학입학을 허용하지 않았고 또 미혼녀는 외국여행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외국으로 가서 공부하고 싶었지만 부친은 완고한 성격이라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당시에 여성이 대학에 진학해 특히 수학분야에서 공부한다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수학에 대한 그녀의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죠. 또 그러한 열정이 없었다면 ‘영혼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수학자’는 탄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Say what you know, do what you must, come what may.” 알고 있는 것은 말하라. 해야 할 것은 반드시 하라. 가능성 있는 것에는 항상 도전하라." 코발레프스카야의 또 다른 명언입니다. 그녀의 학문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비단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그렇습니다. 좋아하는 학문에 대해 광기(madness)에 가까운 집착과 열정 없이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는 공부를 더해야겠다는 생각으로 1868년 고생물학자인 블라디미르 코발레프스키(Vladmir Kovalevsky)와 결혼합니다. 오직 외국으로 나가 공부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사랑 없이 편의를 위한 위장결혼(marriage for convenience)이었죠. 그래서 학문의 중심인 하이델베르크로 갈 수 있었고 대학에 입학해서 그녀의 꿈을 하나둘 펼쳐가기 시작합니다. 위장결혼이 정말 확실하냐? 라는 질문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뒷받침하는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어쨌든 그녀는 고독 속에서 학문에 열중했고, 또 그 속에서 아름다운 시와 영혼을 노래한 건 사실입니다.
수학을 시와 예술로 승화시킨 그녀는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Many who have never had the occasion to discover more about mathematics consider it a dry and arid science. In reality, however, it is a science within which demands the greatest imagination." "수학에 대해 많은 발견을 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은 수학을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가장 위대한 상상력이 필요한 학문이다."라고 말이죠.
다시 말해서 수학은 어떤 학문이나 예술보다도 더 많은 상상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재미있고 아름다운 과학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또 다시 보충하자면 수학은 겉보기에는 어렵고 감정이 없는 냉혹한 학문처럼 보이지만 막상 들어가 보면 쉽고, 감성이 풍부한 따뜻한 학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회피하지 말고 열심히 하세요. 수학은 모든 과학의 기초입니다.
코발레프스카야가 독감이 겹친 폐렴으로 죽음을 며칠 앞둔 시기에 독일의 한 잡지와 인터뷰에서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Did you come across any opponents of your study of mathematics because of your gender or age? 성이나 나이라는 이유 때문에 수학 연구에서 어떤 방해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까?" 병석에 누워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코발레프스카야는 또렷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Actually, my father was my biggest opponent. He put a stop to my lessons. He harbored a strong prejudice against learned woman." 해석하면 "사실, 아버지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배운 여성을 싫어하는 큰 편견이 있었습니다."
남편 블라드미르와의 생활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 남편과는 전혀 사랑하는 마음 없이 위장 결혼했다는 세간의 의혹이 많기 때문에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직접 기자가 직접 물어본 것이죠. "Did you and Vladimir have a social life outside of your studies? 공부(하는 장소)를 떠나서는 남편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까?"
▲ 천재 여성 수학자 코발레프스카야는 온갖 명예에도 불구하고 애증의 갈등 속에서 비참한 생을 마쳤다. ⓒ
코발레프스카야는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No, mathematics was my hiding place. We were still not living together and I was very nervous and withdrawn. I would stay at my desk, pace and return to work for days."
"아닙니다. 수학은 내가 쉴 수 있는 피난처(안식처)입니다. 우리는 계속 같이 살지 않았고 나는 신경이 예민했고 깊이 움츠려 들어 있었죠. 나는 며칠 동안이나 서재에 머물면서 걸어 다니다가는 일터로 가곤 했지요." 여기서 피난처라고 한 것은 남편보다 수학이 더 좋았다는 의미로 해석하기 바랍니다.
그녀의 대답은 다시 이어집니다. "My only recreation was long walks when Vladimir visited. When I returned to Russia I felt released from the prison in which my best thoughts were in bondage. You cannot think what suffering it is to have to speak always foreign languages to your friends. You might as well wear a mask on your face."
"남편이 방문했을 때 유일한 즐거움은 오랫동안 산책하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 나의 가장아름다운 사고를 구속했던 감옥에서 해방된 느낌이었죠. 절친한 친구들에게 외국어로 말해야만 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상상할 수 없을 거예요. 얼굴을 전부 가리는 게 좋을 정도죠."
기자는 자살로 생을 마친 남편의 죽음이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질문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As with any suicide, I had guilt. I still feel somewhat responsible because Fufa and I left Russia and returned to Berlin during the terrible period and his sad end."
해석하면, "어떻게 자살했던 죄책감을 느낍니다. 나는 여전히 어느 정도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남편과 나는 러시아를 떠났으나 최악의 상황 속에서 그가 생을 마감하자 베를린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돈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정유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하자 엉망이 됐고 가난 속에서 남편은 자살해서 죽습니다. 이로 인해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이어지는 마지막 대목을 유심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In an attempt to rid myself of this feelings of guilt, I immersed myself in the mathematical world once more, my hiding place. 나는 이러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피난처인 수학에 다시 한번 몰두하곤 했습니다." 수학에 얼마나 대단한 집착이 있었는지 짐작하시겠죠? 남편에 대한 죄책감도 수학이 해결해 주었던 겁니다.
영혼을 노래한 수학자의 이미지와 달리 성격은 괴팍하고 지독히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았지만 돈이 궁해지자 아기를 돌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막심(Maxim Kovalevsky)이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집니다. 건장하고 뚱뚱해서 ‘Fat Maxim’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에 대한 애칭이죠. 막심은 변호사, 역사가, 사회학자로 돈도 많았고 사회적인 명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고 술회합니다.
"Neither of us can go back to Russia for living. I am never happy with him. We have many fights and I often become jealous and possessive and move quickly from love to anger. He mostly teaches at universities in France and often leaves me."
"우리는 결코 러시아(고향)로 갈 수 없는 처지였지요. 저는 그와 결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많이 다투었고 저는 자주 질투심이 생겼고 소유욕이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증오로 자주 변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대학에서 강의를 자주해서 저와 떨어지곤 했지요" 보충 설명하자면 여기서 질투와 소유욕이란 애인인 막심이 다른 여자들과 사귀기 때문에 생기는 여성의 시기심을 이야기합니다.
"I feel abandoned when we are apart. He seemed to just turn up when I won the Prix Bordin. Even with my honors, I was unhappy because of him.” 헤어져 있을 때는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이었죠. 그(막심)는 내가 보르댕상을 받았을 때 나타났습니다. 내가 받은 여러가지 영광에도 불구하고 저는 막심 때문에 불행했습니다.
천재 여성 수학자 코발레프스카야의 애인 막심에 대한 애정과 분노, 그에 따른 좌절은 대단했습니다. "Letters of congratulations were pouring in from all sides, but I was as miserable as a dog. No, I hope, for their sake, that dogs cannot be as unhappy as human creatures, especially not women."
"(보르댕상을 받았을 때) 여러 곳에서 축하편지가 쇄도했지요. 그러나 저는 개만큼이나 불행했습니다. 희망을 찾을 곳이 없었죠. 개들도 창조물인 인간, 특히 여성만큼 불행할 수는 없을 겁니다." 여성을 복수인 women으로 쓴 걸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남성의 사랑에서 멀어졌을 때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은 비참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겁니다.
▲ 코발레프스카야는 난해한 수학을 시와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
그녀의 생을 빼앗아 간 폐렴을 앓기 시작한 것은 애인 막심과 결별을 선언한 지 이틀 만의 일입니다. 그 스트레스로 바로 독감을 수반한 폐렴을 앓습니다. 그래서 그 병으로 세상을 하직합니다. 수학에 그렇게 대단한 정열을 쏟았던 오늘의 주인공도 애인의 변심에는 어쩔 수가 없었던 건가요? 애인과의 결별과 폐렴은 각기 서로 다른 건데 후세 사람들이 각색한 건 아닌가요?
어쨌든 그녀는 남편 블라디미르와 결혼해 베를린대학에서 수학을 배우고, 1874년 유럽 수학의 본거지인 괴팅겐 대학에서 편미분방정식론, 제3종 아벨적분, 토성의 고리모양 등에 관한 세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귀국 후 남편과 실질적인 결혼생활에 들어갔으나 남편은 곧 사업실패로 자살하고 맙니다.
그 후 1884년 스톡홀름대학의 초청을 받아 교수로 갑니다. 최초의 여성 수학교수가 된 것이죠. 그 곳에서는 ‘고정점(固定點)을 둘러싼 강체(剛體)의 회전에 관한 논문’으로 1888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학술원)로부터 권위 있는 보르댕상(Bordin Prize)을 받습니다. 자서전적 소설 ‘라에프스키가(家)의 자매’ 등의 문학작품도 남겼습니다.
그녀의 수학적 재능은 너무나 특이해 그녀의 어린 시절 침실 벽이 러시아의 한 수학자의 강의 노트로 도배가 되어 있을 정도였다는 이야긴 들어보셨죠? 그래서 독일에서 미적분학 공부를 정식으로 시작할 때 그녀는 이미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고 합니다. 소설에 소질이 있었던 그녀는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와도 친밀했다고 합니다.
‘문장출어빈궁(文章出於貧窮)’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훌륭한 글은 가난 속에서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글 쓰는 선비는 모름지기 청렴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글 재주 좋은 한 양반이 나중에는 이 말을 ‘빈궁출어문장(貧窮出於文章)’으로 바꾸어 ‘글을 쓰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라고 적어놓았고 많은 사람이 또 이를 인용했습니다. 그래서 ‘글 잘하면 빈복하다’는 말도 생긴 겁니다.
요는 수학을 예술로 승화시킨 코발레프스카야의 명언과 그녀의 일생을 접하면서 ‘과연 천재란 불행이라는 업보를 짊어지고 태어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코발레프스카야도 불행한 삶을 살았겠지만 남편 블라디미르도 참 고생했을 것 같네요? 그렇지 않나요? 결혼했으면서도 아내처럼 살아주지 않았던 코발레프스키야에 대해 남편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자이로스코프 방정식을 명확히 해결해 남성을 뛰어 넘은 수학자.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원치 않은 위장결혼까지 마다하지 않은 천재 수학자. 애인에게 버림받은 여성. 수학의 최고봉의 지위에서 50을 넘기지 못한 채 세상을 하직한 비운의 여성 수학자.
천재 여성 수학자에게 현명한 아내, 자상한 어머니의 모습을 요구하는 것은 애당초부터 잘못된 가설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시를 노래하며 수학을 예술의 경지까지 이끌어낸 코발레프스카야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존경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