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 대한 흥분이 젊음과 늙음을 구별한다. 배우고 있는 한 당신은 늙지 않는다. The excitement of learning separates youth from old age. As long as you’re learning, you’re not old.
- Rosalyn Sussman Yalow 로절린 얄로우 -
로절린 얄로우에 대하여
로절린 얄로우
▲ 로절린 얄로우 ⓒ
The excitement of learning separates youth from old age. As long as you’re learning, you’re not old.
배움에 대한 흥분이 젊음과 늙음을 구별한다. 배우고 있는 한 당신은 늙지 않는다. -로절린 얄로우(1921~ ) : 미국의 물리학자, 의학자, 노벨상 수상자-
앞부분을 알기 쉽게 해석하기가 곤란하네요. 이렇게 해석해 보면 어떨까요? "젊음과 늙음은 배움에 대한 흥분의 정도로 구별된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젊었는지 늙었는지를 알려거든 배움을 통해 흥분을 느끼는지 못 느끼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배움에 흥분을 느끼는 한 사람은 늙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런 뜻이겠죠?
과학자가 연구를 통해 지대한 업적을 남기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학문에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느끼는 행복과 흥분이 있어야 합니다. 조그마한 실험실에서 자기와의 고독하고 치열한 싸움 속에서 하나 둘씩 배우고 발견하는 기쁨 속에서 과학자들은 행복을 만끽합니다. 거기에는 생명의 비밀도 있고 우주를 푸는 열쇠도 있습니다.
하긴 따지자면 모든 학문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학문을 하는 사람은 사막의 탁발승만큼이나 외롭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탁발승(mendicant priest, begging priest)이 뭔지는 아시죠? 허술한 차림에 목탁을 두드리며 걸식을 하는 불교의 스님이 생각납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탁발승은 왜 외로운 것인가요? 또 학문은요?
탁발(托鉢)은 승려들이 걸식으로 의식(衣食)을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불교에서 출가 수행자들이 지켜야 할 규율(12두타행) 가운데 걸식이 있습니다. 구걸하는 것이죠. 탁(托)은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탁자(托子, table)가 그렇습니다. 발(鉢)이란 음식을 담는 그릇인 발우(鉢盂)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탁발승이란 걸식을 통해 얻은 음식이 담긴 발우에 의지해 살아가는 승려를 뜻합니다.
불교에서 수행자에게 탁발을 생활수단으로 규정한 것은 그들이 상업활동은 물론이고 어떤 생산활동에도 종사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고 수행자는 탁발을 통해 사람들의 고마움을 알고 수행의 가장 큰 적인 자만과 고집을 없애야 한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겁니다.
기독교에도 탁발이 있습니다. 탁발수도회(Ordines mendicantium)가 그것이죠. 평화의 기도로 잘 알려진 1210년 무렵의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1216년 도미니쿠스가 창설한 도미니크 수도회가 있습니다. 부와 세속적 권력에서 벗어나 진정한 종교와 삶의 길을 추구하자는 것이죠. 청빈생활을 했던 프란체스코는 우리나라 초의선사처럼 새들과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수도회에 대해 이단 시비를 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입니다.
간디가 말하기를 “백년마다 프란체스코와 같은 사람이 한 사람만이라도 나타난다면 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졌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쨌든 학문의 길에 접어든 사람을 탁발승으로 표현한 것은 돈이나 명예와 관계없이 학문 자체에서 깨달음과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거죠. 그리고 탁발승과 관련한 이 말은 서양에서 나온 겁니다. 이야기가 빗나갔네요. 오늘의 주인공 로절린 얄로우(Rosalyn Sussman Yalow)로 갑시다.
In the past, few women have tried and even fewer have succeeded(과거에 도전을 시도한 여성은 거의 없다. 더구나 성공한 여성은 더욱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여성이 노벨상이라는 최고의 영예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주위 환경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마리 큐리처럼 남편과 같이 공동으로 상을 받는다든가 부모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성공하는 게 그러한 사례입니다. 지난번에 소개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마리아 메이어(Maria Mayer)는 남편의 헌신적인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경우입니다. 원래 집안도 교수 집안이었다고 합니다. 모든 환경이 좋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절린 얄로우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과학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여성들의 아버지는 건축사, 의사, 치과의, 그리고 대학 교수 등 돈도 잘 벌고 명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얄로우의 부친은 유태인으로서 미국으로 이민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뉴욕의 한 주택가에서 종이를 파는 장사꾼이었습니다.
▲ 가난을 극복하고 노벨상의 영예를 안은 얄로우. 그래서 그의 영예는 더욱 값진 것이다. ⓒ
I have long felt that the trouble with discrimination is not discrimination itself, but rather that the people who are discriminated against think of themselves as second-class(내가 오랫동안 느낀 것은 차별의 문제는 차별 그 자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차별 받는 사람들이 자신을 스스로 이류 계층(하층)이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이다).
유태인들의 저력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 같네요. 노벨상과 유태인을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고요. 그러나 미국에서 태어나 성장한 노벨상 수상 여성과학자 세 명 중 두 명이 유태인입니다. 기독교도는 1983년 노벨 의학 및 생리학상을 받은 바바라 매클린턱(Barbara McClintock)입니다.
그런데 2천년 동안 객지에서 헤매다가 다시 이스라엘을 건국한 유태인들이 자신을 유태인이라고 하는 근거는 뭘까요? 유태교를 믿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들이 주장하는 전설 속의 조상 아브라함의 피를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인가요? 유태인이면서 기독교를 믿는다면 그 사람을 유태인이라고 하나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흑인들 가운데도 유태교를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태인은 혈통의 개념이 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유태인들은 왜 미국이나 영국 사람들과 같이 앵글로 색슨처럼 보일까요?
이와 반대로 모슬렘은 종교의 개념이 강한 것 같습니다. 흑인이든 아니면 황인종이든 간에 같은 이슬람교를 믿으면 모슬렘의 형제로 받아들입니다. 어떤 의미로 본다면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쪽은 2천년간 유랑했던 유태인들이 아니라 중동에 터전을 두고 살아온 이슬람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더 맞습니다.
2004년 영국의 한 연구팀이 첨단 법의학 및 컴퓨터 기술을 동원해 예수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맨체스터 대학 연구팀이 BBC에 방영하기 위해 그린 예수의 얼굴은 뭉툭한 코에 짙은 갈색 피부, 짧은 고수머리를 한 전형적인 유태인 농부의 얼굴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로부터 원망을 사기도 했죠
연구팀은 이스라엘 예루살렘 부근에서 도로공사 중 발견된 1세기로 추정되는 유대인들의 두개골을 참고로 그렸다고 합니다. 아마 존재했다면 아브라함도 그런 얼굴이고 모세도, 솔로몬도 비슷한 얼굴일 겁니다. 14세기가 지난 후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의 예수와 12제자와는 전혀 딴 판이죠.
다 빈치가 영감을 갖고 그렸든, 계시를 받고 그렸든 간에 허구에 가까운 그 그림을 갖고 인간은 흥분합니다. ‘다 빈치’의 소설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습니다. 아마 제 생각에는 우상을 금기시하는 유태교와 기독교의 전통 때문에 예수에 대한 그림을 그리지 못하다가 자유의 문이 열린 르네상스를 맞아 다 빈치가 최초로 예수의 얼굴을 그렸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세한 것은 잘 모르지만요.
우리나라는 유태인에 대해서 편견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을 모범적인 모델 국가로 생각하면서 친근감을 표시합니다. 세계적으로 드문 경우입니다. 물론 많이 달라졌고 심지어 미국에서는 대통령 후보(presidential candidate)로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유태인은 기독교가 가장 싫어하는 악마(devil), 마녀(witch) 그 자체였습니다. 마녀사냥(witch hunt)의 대표적인 제물이 유태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태인이 예수를 죽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치가 6백만에 달하는 유태인을 학살한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저변에는 인간의 가장 비타협적이고 이기적 속성인 종교가 많은 작용을 했습니다. 유태인은 미국에서 학계, 정계, 언론, 그리고 특히 석유산업 등 재계에서 돈을 주무르고 있습니다. 좋은 분야죠.
그러나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췄지만 마피아에서도 유태인의 활약상은 대단했습니다. 어쨌든 유태인이 생존력과 혈통을 이어가기 위해 자식을 낳고 기르는 번식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자본주의는 유태인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라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로 자본주의 시대에 유태인의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미국이지만 미국을 지배하는 것은 유태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We must believe in ourselves or no one else will believe in us; we must match our aspiration with the competence, courage, and determination to succeed(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우리를 믿을 것인가.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 능력, 용기, 결단을 열망과 연결시켜야 한다).
얄로우는 1977년 로저 기유맹(Roger Charles Luois Guillemin) 박사와 앤드루 샐리(Andrew Victor Schally) 박사와 함께 의학 및 생리학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 뇌의 시상하부에서 만들어지고, 다른 호르몬 분비선들의 작용을 조절하는 호르몬을 분리하고 합성한 공로 때문입니다. 얄로우의 업적은 방사성면역측정법(radioimmunoassay) 개발입니다.
원래 일리노이대학 대학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얄로우는 졸업한 후 브롱크스 재향군인 병원의 방사성동위체 연구실에 근무하면서 혈중 인슐린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합니다. 그녀의 인슐린 항체존재설은 비상식적이라고 해서 부정됐지만 그것을 위해 개발한 방사성면역측정법은 많은 분야에서 지금도 유익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업적이 노벨상 수상을 가능케 한 것이죠.
뉴욕의 빈민가에서 자란 얄로우는 성격이 특이하면서 자신이 태어난 그 빈민가를 좋아했습니다. I have always resided and worked there except for three years and a half when I was a graduate student at the University of Illinois. Perhaps the earliest memories I have are of being a stubborn, determined child(일리노이 대학 대학원생이었을 때인 3년 반을 빼놓고는 거기에서 계속 살고 일했다. 어릴 때의 기억으로는 아마도 고집이 강하고 완고한 애였다). 자서전에서 밝힌 내용입니다.
원래 수학에 흥미가 있었던 얄로우는 좋아하는 선생님이 화학 선생님이라서 화학을 좋아했고 대학에서도 화학을 전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 그녀가 살던 지역에 있는 헌터(Hunter) 여자대학에는 화학과가 없어 물리학을 전공합니다. 일리노이대학 대학원에서 물리학 박사를 받은 얄로우의 인슐린에 대한 지식은 브롱크스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얻은 게 전부입니다.
가난하게 자란 얄로우는 책을 맘대로 읽을 형편이 못됐습니다. I was an early reader, reading even before kindergarten, and since we did not have books in my home, my older brother, Alexander, was responsible for our trip every week to the public library to exchange already read for new ones to be read(난 유치원 들어가기 전에도 책을 읽을 정도로 일찍부터 책을 읽었다. 집에는 책이 없었기 때문에 알렉산더 오빠가 주마다 공공 도서관에 데려다 주었다. 그래서 읽은 책을 새 책과 교환하곤 했다).
얄로우는 노벨상을 받은 여성 과학자 가운데 주위의 도움 없이 가난을 극복하고 홀로서기에 성공한 유일한 여성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노벨상 수상은 더욱 값진 것이죠. 사람이 현명한가 아닌가의 차이는 학벌이 아니라 독서량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합니다. 희망과 미래도 그 속에 있습니다. 얄로우의 성공은 독서에서 시작됐습니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는 말 다 아시죠? 남자라면 다섯 수레 정도 분량의 책은 읽어야 한다는 말 말입니다. 남녀 가릴 것 없습니다.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한 말입니다. 또 장자가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누가 말했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