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진님이 쓰신 "진보진영에 고함- 진화하지 못한 진보는 보수다" 라는 글입니다. 이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진보는 실패했다. 자칭 진보, 스스로 진보라 여겨 앞장섰던 이들은 실패했다. 그들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누가 뭐라 해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항상 “그래도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그동안의 성과를 자랑해도, 지금, 바로 이 자리, 현 시점에서 진보는 실패했다. 그것도 아주 분명히 실패했다.
가장 인상에 남은 구절 "자위로는 임신할 수 없다"
해당 글은 아래에
진화하지 못한 진보는 보수다
진보는 실패했다. 자칭 진보, 스스로 진보라 여겨 앞장섰던 이들은 실패했다. 그들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누가 뭐라 해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항상 “그래도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그동안의 성과를 자랑해도, 지금, 바로 이 자리, 현 시점에서 진보는 실패했다. 그것도 아주 분명히 실패했다. 진보가 실패한 이유에는 그들 내부에 존재하는 여덟 가지 원인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큰 문제는 이 8가지 각각의 원인들이 제각각 따로 작용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원인들과 모두 연결되어 한꺼번에 나타났다는 점이다.
만약 자칭 진보진영이 이 ‘참패 8원인’을 부정하고 애써 외면한다면 앞으로도 참패를 면치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고 더 이상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원인 1: 전략적이고 체계적으로 사고하고 대응하지 못했다.
전략적이고 체계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은 전략적이고 체계적으로 사고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매번 ‘그때마다’, 그리고 ‘사안마다’의 공격에만 치중해 결국 자신들이 가야할 방향과 목표를 놓쳤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사람들 모두가 살고 싶어 하는 성이 있다. 그 성은 지금처럼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세계가 아니라, 약자를 배려하고 서로 돕고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이 사는, 자율적인 질서와 사랑과 신뢰가 넘치는 아름다운 곳이다. 그 성에서 살고 싶은 많은 이들은 합심해서 출발했다. 그러다 추운 겨울이 왔고 날이 갈수록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눈보라를 이기기 위해 사람들은 앞도 보지 못한 채, 제각기 한 발 한 발 내딛는 데만 온 힘을 집중했다.
그러다 주위를 둘러보던 몇몇 사람이 눈 위에 가득한 어지러운 발자국들을 발견하고는 우리가 제자리에서만 맴돌고 있으니 제발 앞을 보고 방향을 잃지 말자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그들을 향해 ‘방해꾼’, ‘이간질꾼’이라 조롱하며 따돌렸다. 그리고 이렇게 된 것은 앞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눈보라 때문이니 이 겨울이 지나가기만 기다리면 된다고 우겨댔다.
현재 진보진영의 형국이다. 이런 경우라면 누구나 앞뒤를 분간할 수 없으니 제자리걸음만 할 수도 있다. 사람이니까. 그리고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면 나아질 거라고도 할 수도 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정말 그들이 기다리는 봄이 올 수도 있으니까. 문제는 앞으로 잘 가고 있는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끼어든다고 우기는 사람들이다.
이는 각각의 부대가 전투에만 매달려 싸우느라 전쟁의 큰 목적을 놓치고 전략과 체계도 제대로 세우지 못해 전쟁에서 패하고 있는데도, 이기고 있다고 박박 우기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최소한 내 옆 동료에 지원사격이라도 해줘야 하는데 그럴 여유가 없다. 내 싸움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자신들이 이기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눈보라 거세도, 자신의 싸움이 아무리 치열해도 저 멀리 앞을 봐야 하고 옆을 봐야 한다. 자신들이 가졌던 꿈과 목표와 큰 그림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원하는 성에 갈 수 있고, 그래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 짬짬이 고개를 들어 자신들이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지, 어디까지 왔는지, 함께 떠난 사람 중에 낙오자나 다친 사람은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
원인 2: 전제(專制)적이고 권위적이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민주적이지도 않았고 자율적이지 못했다는 얘기다. 권위주의에 대항해 싸웠지만 자신 안에 자리하고 있는 ‘전제주의적인’ 습관과 ‘권위적인’ 성품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전제적이고 권위적이었기 때문에 ①비판이나 다른 의견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고, ②설사 귀 기울인다 해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③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에게는 적대적으로 행동하거나 무시해 모멸감을 주어 ④다시는 다른 의견이나 비판을 내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⑤배우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가르치려고만 들고(문제는 가르치는 행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려고 하는 내용 대부분이 20년 전의 개념이거나 자신의 특수한 경험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⑥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의 발전을 위해 능력 있는 사람을 물색하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고, 인물이 있다손 치더라도 데려오기 위한 설득도 하지 않고, ⑦재능 있는 하부조직의 사람을 키우는데도 인색하고, ⑧자신을 희생해 앞장서서 싸우려 하기보다는 앞에 나서서 플래시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이벤트에만 급급하고, ⑨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⑩포퓰리즘에 입각한 대중선동에 더 열중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인 3: 자신들이 원하는 가치를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 미국산 수입 쇠고기 파문이 진-보 간 갈등으로 야기되면서 문화체육관광부 홍보지원국 소속 12명이 참가한 정책 커뮤니케이션 교육에 사용된 자료집 '공공갈등과 정책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의 일부.
대중의 지지율이 더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에 대한 설득’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가치에 대한 설득에 실패했다는 것은 ‘가치를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은 ‘자신들이 원했던 가치와 가야할 방향’을 놓쳤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진보진영은 ‘현재 어디에 가치를 두고 있는지’, ‘왜 정권을 잡으려고 하는지’, ‘정권을 잡으면 대한민국을 어떤 나라로 만들 것인지’에 대한 큰 그림을 선명하게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다. ‘어떤 것에 가치를 두고, 어떤 방법으로 국정을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이 없으니, 근본도 없는 ‘숭미어용보수’와 천박한 ‘우익모리배’들이 내놓은 ‘좌파빨갱이’라는 극단적인 개념을 제외하고는, 일반인들에게는 아직도 진보진영에 대해 선명하게 떠오르는 개념이 없는 것이다.
원인 4: 어용보수와 우익의 ‘이데올로기 프레임’에 갇혔다.
이는 진보진영이 ‘사대주의’와 ‘일제식민사관’, 그리고 ‘반공이데올로기’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했던 현상이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들의 가치를 알릴 수 있는 새로운 언어나 프레임을 상상해내지 못했고, 가치 있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전파해야 하는 점에 집중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선제공격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근본도 없는 ‘숭미어용보수’와 천박한 ‘우익모리배’들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내내 끌려만 다니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원인 5: 왜 ‘정당’과 ‘시민단체’를 만들었는지를 잊었다.
87년 이후 ‘대중 속으로!’의 기치 아래 운동권 세력은 대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대중의 이익을 위해 ‘정당’이나 ‘시민단체’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들이 위하기로 했던 대중은 잊고, 정당을 만든 이들은 그들만의 생각으로, ‘시민단체’를 만든 이들은 단체를 운영하는 사람들만의 생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의 대중’과 호흡하는 법을 잊었고, 결국 그들의 대중과 분리되었다.
원인 6: ‘자기합리화’와 ‘자위’를 즐겼다.
매번 선거가 끝나고 스스로를 평가할 때 ‘그래도 성공했다’며 자축한다. 하지만 정말 ‘그래도 성공한 것’일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이 정치무대에 등장한지 10년이란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국민들 대다수는 진보진영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국회의원은 고사하고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자치단체의원 후보조차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대명사격인 영국 노동당의 지지율과 비교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한국적 특수상황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말로 합리화하지 않고, 자위하지 않고 더 강도 높은 비판으로 문제를 찾고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했더라면, 지지율이 지금보다 더 높아지지는 않았을까? 어느 누군가도 얘기했듯이 ‘자위로는 임신할 수 없는 법’이다.
원인 7: 패거리 문화를 답습했다.
자신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은 배척하다보니 내부에서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뭉친 동아리가 생겼다. 그리고 그 동아리는 조직이 되었다. 문제는 그런 ‘조직을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정당 또는 시민단체 전체나 국민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들 조직에 돌아올 이익과 기득권을 위해’ 움직였다는 것이다. 동아리와 패거리의 차이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자신들 패거리의 이익을 위해 머리수로 대응하거나 배타적으로 물리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깡패조직이며, 근본도 없는 ‘숭미어용보수’와 천박한 ‘우익모리배’들과 다름없다.
이는 대화와 설득을 통해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고 조정하는 ‘참된 민주주의 정치’가 아니다. ‘민주제의 타락한 정치체제(政治體制)’인 ‘중우정치’이며, 다수의 횡포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원인 8: 문제를 내 안에서가 아닌 외부에서만 찾았다.
굳이 성인들의 말을 빌리고, 자기 계발서의 문구를 인용하지 않아도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다"는 것은 아마 초등학생도 아는 말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간디가 주창했던 ‘스와라지(자치, 독립, 해방) 운동’이 승리한 이유가 ‘내적인 해방’을 포함해 ‘민족의 해방’을 주창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진보진영은 이런 진정한 ‘자기해방’을 위한 철저한 ‘자기반성’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밖에서 일어나는 일뿐만 아니라 내 안의 무엇이 문제인지, 조직 내부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찾아내야 한다.
'진보'의 개념을 잃은 진보는 더이상 '진보'가 아니다.
개념이 없으면 그에 해당하는 언어 표현도 없는 법이다. 역으로 언어가 없으면 개념도 없다. 진보는 ‘왜 자신이 진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개념을 놓쳤고, 개념을 놓쳤기 때문에 가치와 큰 그림에 대한 프레임을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한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명확한 슬로건’도 제대로 만들어 낼 수 없게 되었다. 역으로 진보진영이 원하는 가치를 담아낸 언어를 슬로건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진보에 대한 인식이 아직도 선명하지 못한 개념이 되어버린 것이다.
‘보수’라는 개념은 ‘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거부하고 현재(또는 과거)를 고수하려는 것’이며, ‘진보’라는 개념은 ‘더 나아지기 위해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그대로를 답습하는 이들은 ‘보수주의자’이며, 변화를 추구하며 더 나아지려고 애를 쓰는 이들은 ‘진보주의자’이다.
세상은 변하고 사람들도 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진화하지 못하는 사람과 조직이 어떻게 ‘진보’일 수 있는가. 그들은 어느 사이에 자신의 것만을 고수하려고 하는 보수가 되었는데, 그 사실도 인식하지 못한 채 ‘진보라 착각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지금의 진보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닌 보수’인 것이다.
그래서 진보는 실패했다. 자신을 ‘진보’라 규정했던 ‘진보’의 개념을 놓쳤기 때문에 실패했다. 더 이상 진화하지 못한 채 ‘진보의 허울을 쓴 보수’가 되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권위적이고 비민주적인 내 안의 적’을 인정하지 않고 바깥에서 벌어지는 부정과 비리에만 공격을 집중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결론은 또다시 원론으로 돌아가자는 얘기냐며 식상하고 진부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원론이 인류를 지탱해 왔던 근본이 되었다. 바로 그 원론이 모든 것의 기본이며 시작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역사책들도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이런 기본을 따르려고 노력했던 이들은 지금까지 존경을 받고, 이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한 이들은 아직도 증오와 멸시를 받는다는 것을.
스스로 근본을 무시하며 기본을 지키지 않는 자가 그 어떤 누구에게 칼을 들이댈 수 있는가. 그리고 세월의 변화를 따라잡지도 못하고, ‘더 이상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는 진보’가 어떻게 '진보'이며, 그런 '진보'가 어떻게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구할 수 있는가. 가장 큰 적은 내 안에, 그리고 내부에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