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 대한 흥분이 젊음과 늙음을 구별한다. 배우고 있는 한 당신은 늙지 않는다. The excitement of learning separates youth from old age. As long as you’re learning, you’re not old.
- Rosalyn Sussman Yalow 로절린 얄로우 -
로절린 얄로우에 대하여
로절린 얄로우
▲ 로절린 얄로우 ⓒ
The excitement of learning separates youth from old age. As long as you’re learning, you’re not old.
배움에 대한 흥분이 젊음과 늙음을 구별한다. 배우고 있는 한 당신은 늙지 않는다. -로절린 얄로우(1921~ ) : 미국의 물리학자, 의학자, 노벨상 수상자-
앞부분을 알기 쉽게 해석하기가 곤란하네요. 이렇게 해석해 보면 어떨까요? "젊음과 늙음은 배움에 대한 흥분의 정도로 구별된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젊었는지 늙었는지를 알려거든 배움을 통해 흥분을 느끼는지 못 느끼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배움에 흥분을 느끼는 한 사람은 늙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런 뜻이겠죠?
과학자가 연구를 통해 지대한 업적을 남기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학문에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느끼는 행복과 흥분이 있어야 합니다. 조그마한 실험실에서 자기와의 고독하고 치열한 싸움 속에서 하나 둘씩 배우고 발견하는 기쁨 속에서 과학자들은 행복을 만끽합니다. 거기에는 생명의 비밀도 있고 우주를 푸는 열쇠도 있습니다.
하긴 따지자면 모든 학문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학문을 하는 사람은 사막의 탁발승만큼이나 외롭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탁발승(mendicant priest, begging priest)이 뭔지는 아시죠? 허술한 차림에 목탁을 두드리며 걸식을 하는 불교의 스님이 생각납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탁발승은 왜 외로운 것인가요? 또 학문은요?
탁발(托鉢)은 승려들이 걸식으로 의식(衣食)을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불교에서 출가 수행자들이 지켜야 할 규율(12두타행) 가운데 걸식이 있습니다. 구걸하는 것이죠. 탁(托)은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탁자(托子, table)가 그렇습니다. 발(鉢)이란 음식을 담는 그릇인 발우(鉢盂)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탁발승이란 걸식을 통해 얻은 음식이 담긴 발우에 의지해 살아가는 승려를 뜻합니다.
불교에서 수행자에게 탁발을 생활수단으로 규정한 것은 그들이 상업활동은 물론이고 어떤 생산활동에도 종사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고 수행자는 탁발을 통해 사람들의 고마움을 알고 수행의 가장 큰 적인 자만과 고집을 없애야 한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겁니다.
기독교에도 탁발이 있습니다. 탁발수도회(Ordines mendicantium)가 그것이죠. 평화의 기도로 잘 알려진 1210년 무렵의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1216년 도미니쿠스가 창설한 도미니크 수도회가 있습니다. 부와 세속적 권력에서 벗어나 진정한 종교와 삶의 길을 추구하자는 것이죠. 청빈생활을 했던 프란체스코는 우리나라 초의선사처럼 새들과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수도회에 대해 이단 시비를 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입니다.
간디가 말하기를 “백년마다 프란체스코와 같은 사람이 한 사람만이라도 나타난다면 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졌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쨌든 학문의 길에 접어든 사람을 탁발승으로 표현한 것은 돈이나 명예와 관계없이 학문 자체에서 깨달음과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거죠. 그리고 탁발승과 관련한 이 말은 서양에서 나온 겁니다. 이야기가 빗나갔네요. 오늘의 주인공 로절린 얄로우(Rosalyn Sussman Yalow)로 갑시다.
In the past, few women have tried and even fewer have succeeded(과거에 도전을 시도한 여성은 거의 없다. 더구나 성공한 여성은 더욱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여성이 노벨상이라는 최고의 영예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주위 환경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마리 큐리처럼 남편과 같이 공동으로 상을 받는다든가 부모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성공하는 게 그러한 사례입니다. 지난번에 소개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마리아 메이어(Maria Mayer)는 남편의 헌신적인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경우입니다. 원래 집안도 교수 집안이었다고 합니다. 모든 환경이 좋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절린 얄로우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과학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여성들의 아버지는 건축사, 의사, 치과의, 그리고 대학 교수 등 돈도 잘 벌고 명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얄로우의 부친은 유태인으로서 미국으로 이민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뉴욕의 한 주택가에서 종이를 파는 장사꾼이었습니다.
▲ 가난을 극복하고 노벨상의 영예를 안은 얄로우. 그래서 그의 영예는 더욱 값진 것이다. ⓒ
I have long felt that the trouble with discrimination is not discrimination itself, but rather that the people who are discriminated against think of themselves as second-class(내가 오랫동안 느낀 것은 차별의 문제는 차별 그 자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차별 받는 사람들이 자신을 스스로 이류 계층(하층)이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이다).
유태인들의 저력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 같네요. 노벨상과 유태인을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고요. 그러나 미국에서 태어나 성장한 노벨상 수상 여성과학자 세 명 중 두 명이 유태인입니다. 기독교도는 1983년 노벨 의학 및 생리학상을 받은 바바라 매클린턱(Barbara McClintock)입니다.
그런데 2천년 동안 객지에서 헤매다가 다시 이스라엘을 건국한 유태인들이 자신을 유태인이라고 하는 근거는 뭘까요? 유태교를 믿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들이 주장하는 전설 속의 조상 아브라함의 피를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인가요? 유태인이면서 기독교를 믿는다면 그 사람을 유태인이라고 하나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흑인들 가운데도 유태교를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태인은 혈통의 개념이 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유태인들은 왜 미국이나 영국 사람들과 같이 앵글로 색슨처럼 보일까요?
이와 반대로 모슬렘은 종교의 개념이 강한 것 같습니다. 흑인이든 아니면 황인종이든 간에 같은 이슬람교를 믿으면 모슬렘의 형제로 받아들입니다. 어떤 의미로 본다면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쪽은 2천년간 유랑했던 유태인들이 아니라 중동에 터전을 두고 살아온 이슬람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더 맞습니다.
2004년 영국의 한 연구팀이 첨단 법의학 및 컴퓨터 기술을 동원해 예수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맨체스터 대학 연구팀이 BBC에 방영하기 위해 그린 예수의 얼굴은 뭉툭한 코에 짙은 갈색 피부, 짧은 고수머리를 한 전형적인 유태인 농부의 얼굴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로부터 원망을 사기도 했죠
연구팀은 이스라엘 예루살렘 부근에서 도로공사 중 발견된 1세기로 추정되는 유대인들의 두개골을 참고로 그렸다고 합니다. 아마 존재했다면 아브라함도 그런 얼굴이고 모세도, 솔로몬도 비슷한 얼굴일 겁니다. 14세기가 지난 후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의 예수와 12제자와는 전혀 딴 판이죠.
다 빈치가 영감을 갖고 그렸든, 계시를 받고 그렸든 간에 허구에 가까운 그 그림을 갖고 인간은 흥분합니다. ‘다 빈치’의 소설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습니다. 아마 제 생각에는 우상을 금기시하는 유태교와 기독교의 전통 때문에 예수에 대한 그림을 그리지 못하다가 자유의 문이 열린 르네상스를 맞아 다 빈치가 최초로 예수의 얼굴을 그렸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세한 것은 잘 모르지만요.
우리나라는 유태인에 대해서 편견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을 모범적인 모델 국가로 생각하면서 친근감을 표시합니다. 세계적으로 드문 경우입니다. 물론 많이 달라졌고 심지어 미국에서는 대통령 후보(presidential candidate)로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유태인은 기독교가 가장 싫어하는 악마(devil), 마녀(witch) 그 자체였습니다. 마녀사냥(witch hunt)의 대표적인 제물이 유태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태인이 예수를 죽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치가 6백만에 달하는 유태인을 학살한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저변에는 인간의 가장 비타협적이고 이기적 속성인 종교가 많은 작용을 했습니다. 유태인은 미국에서 학계, 정계, 언론, 그리고 특히 석유산업 등 재계에서 돈을 주무르고 있습니다. 좋은 분야죠.
그러나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췄지만 마피아에서도 유태인의 활약상은 대단했습니다. 어쨌든 유태인이 생존력과 혈통을 이어가기 위해 자식을 낳고 기르는 번식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자본주의는 유태인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라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로 자본주의 시대에 유태인의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미국이지만 미국을 지배하는 것은 유태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We must believe in ourselves or no one else will believe in us; we must match our aspiration with the competence, courage, and determination to succeed(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우리를 믿을 것인가.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 능력, 용기, 결단을 열망과 연결시켜야 한다).
얄로우는 1977년 로저 기유맹(Roger Charles Luois Guillemin) 박사와 앤드루 샐리(Andrew Victor Schally) 박사와 함께 의학 및 생리학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 뇌의 시상하부에서 만들어지고, 다른 호르몬 분비선들의 작용을 조절하는 호르몬을 분리하고 합성한 공로 때문입니다. 얄로우의 업적은 방사성면역측정법(radioimmunoassay) 개발입니다.
원래 일리노이대학 대학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얄로우는 졸업한 후 브롱크스 재향군인 병원의 방사성동위체 연구실에 근무하면서 혈중 인슐린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합니다. 그녀의 인슐린 항체존재설은 비상식적이라고 해서 부정됐지만 그것을 위해 개발한 방사성면역측정법은 많은 분야에서 지금도 유익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업적이 노벨상 수상을 가능케 한 것이죠.
뉴욕의 빈민가에서 자란 얄로우는 성격이 특이하면서 자신이 태어난 그 빈민가를 좋아했습니다. I have always resided and worked there except for three years and a half when I was a graduate student at the University of Illinois. Perhaps the earliest memories I have are of being a stubborn, determined child(일리노이 대학 대학원생이었을 때인 3년 반을 빼놓고는 거기에서 계속 살고 일했다. 어릴 때의 기억으로는 아마도 고집이 강하고 완고한 애였다). 자서전에서 밝힌 내용입니다.
원래 수학에 흥미가 있었던 얄로우는 좋아하는 선생님이 화학 선생님이라서 화학을 좋아했고 대학에서도 화학을 전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 그녀가 살던 지역에 있는 헌터(Hunter) 여자대학에는 화학과가 없어 물리학을 전공합니다. 일리노이대학 대학원에서 물리학 박사를 받은 얄로우의 인슐린에 대한 지식은 브롱크스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얻은 게 전부입니다.
가난하게 자란 얄로우는 책을 맘대로 읽을 형편이 못됐습니다. I was an early reader, reading even before kindergarten, and since we did not have books in my home, my older brother, Alexander, was responsible for our trip every week to the public library to exchange already read for new ones to be read(난 유치원 들어가기 전에도 책을 읽을 정도로 일찍부터 책을 읽었다. 집에는 책이 없었기 때문에 알렉산더 오빠가 주마다 공공 도서관에 데려다 주었다. 그래서 읽은 책을 새 책과 교환하곤 했다).
얄로우는 노벨상을 받은 여성 과학자 가운데 주위의 도움 없이 가난을 극복하고 홀로서기에 성공한 유일한 여성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노벨상 수상은 더욱 값진 것이죠. 사람이 현명한가 아닌가의 차이는 학벌이 아니라 독서량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합니다. 희망과 미래도 그 속에 있습니다. 얄로우의 성공은 독서에서 시작됐습니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는 말 다 아시죠? 남자라면 다섯 수레 정도 분량의 책은 읽어야 한다는 말 말입니다. 남녀 가릴 것 없습니다.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한 말입니다. 또 장자가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누가 말했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알고 있는 것은 말하라. 해야 할 것은 반드시 하라. 가능성 있는 것에는 항상 도전하라. Say what you know, do what you must, come what may.
- Sofia Vasilyevna Kovalevskaya 소피아 코발레프스카야 -
코발레프스카야에 관한 정보는 아래에..
코발레프스카야
▲ 소피아 코발레프스카야. ⓒ
"It is impossible to be a mathematician without being a poet in soul."
"영혼 속에서 시를 노래하지 않고서는 (위대한) 수학자가 될 수 없다." -코발레프스카야(1850~1891): 러시아 출신의 수학자, 물리학자, 시인, 소설가-
수학을 예술로 승화시킨 소피아 코발레프스카야(Sofia Vasilyevna Kovalevskaya). 그녀는 수학 속에서 영혼을 노래한 시인으로 근세 유럽이 배출한 천재 여성 수학자입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그녀에게 ‘영혼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수학자’라는 별칭을 지어 주었습니다. 소개하는 짧은 명언이 그 전부를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코발레프스카야의 대단한 업적을 대표하는 말이 있습니다. "She is famous mathematician and writer who made a valuable contribution to the theory of partial differential equations. … She was the first woman in modern Europe to gain a doctorate in mathematics, the first to join the editorial board of scientific journal, and the first to be appointed professor of mathematics."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그녀는 유명한 수학자이며 소설가로 편미분방정식 이론에 지대한 공로를 남겼다. … 그녀는 근대 유럽시대에 수학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처음 받은 여성이다. 과학저널 첫 여성 편집위원이었고 수학교수로 임명된 첫 여성이다." 대단한 여성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릴 때는 소피아 대신 소냐라고 불리었습니다. 1850년 1월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그녀의 아버지는 한때 러시아 황제 친위대 장군을 지냈던 인물로 집안은 유복했지만 가정은 엄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수학에 재능을 보인 소냐는 가정교사를 통해 집안에서 교육을 받았고 수학을 더 공부하고 싶었으나 대학은 진학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러시아에서는 여성에게 대학입학을 허용하지 않았고 또 미혼녀는 외국여행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외국으로 가서 공부하고 싶었지만 부친은 완고한 성격이라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당시에 여성이 대학에 진학해 특히 수학분야에서 공부한다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수학에 대한 그녀의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죠. 또 그러한 열정이 없었다면 ‘영혼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수학자’는 탄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Say what you know, do what you must, come what may.” 알고 있는 것은 말하라. 해야 할 것은 반드시 하라. 가능성 있는 것에는 항상 도전하라." 코발레프스카야의 또 다른 명언입니다. 그녀의 학문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비단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그렇습니다. 좋아하는 학문에 대해 광기(madness)에 가까운 집착과 열정 없이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는 공부를 더해야겠다는 생각으로 1868년 고생물학자인 블라디미르 코발레프스키(Vladmir Kovalevsky)와 결혼합니다. 오직 외국으로 나가 공부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사랑 없이 편의를 위한 위장결혼(marriage for convenience)이었죠. 그래서 학문의 중심인 하이델베르크로 갈 수 있었고 대학에 입학해서 그녀의 꿈을 하나둘 펼쳐가기 시작합니다. 위장결혼이 정말 확실하냐? 라는 질문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뒷받침하는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어쨌든 그녀는 고독 속에서 학문에 열중했고, 또 그 속에서 아름다운 시와 영혼을 노래한 건 사실입니다.
수학을 시와 예술로 승화시킨 그녀는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Many who have never had the occasion to discover more about mathematics consider it a dry and arid science. In reality, however, it is a science within which demands the greatest imagination." "수학에 대해 많은 발견을 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은 수학을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가장 위대한 상상력이 필요한 학문이다."라고 말이죠.
다시 말해서 수학은 어떤 학문이나 예술보다도 더 많은 상상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재미있고 아름다운 과학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또 다시 보충하자면 수학은 겉보기에는 어렵고 감정이 없는 냉혹한 학문처럼 보이지만 막상 들어가 보면 쉽고, 감성이 풍부한 따뜻한 학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회피하지 말고 열심히 하세요. 수학은 모든 과학의 기초입니다.
코발레프스카야가 독감이 겹친 폐렴으로 죽음을 며칠 앞둔 시기에 독일의 한 잡지와 인터뷰에서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Did you come across any opponents of your study of mathematics because of your gender or age? 성이나 나이라는 이유 때문에 수학 연구에서 어떤 방해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까?" 병석에 누워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코발레프스카야는 또렷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Actually, my father was my biggest opponent. He put a stop to my lessons. He harbored a strong prejudice against learned woman." 해석하면 "사실, 아버지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배운 여성을 싫어하는 큰 편견이 있었습니다."
남편 블라드미르와의 생활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 남편과는 전혀 사랑하는 마음 없이 위장 결혼했다는 세간의 의혹이 많기 때문에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직접 기자가 직접 물어본 것이죠. "Did you and Vladimir have a social life outside of your studies? 공부(하는 장소)를 떠나서는 남편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까?"
▲ 천재 여성 수학자 코발레프스카야는 온갖 명예에도 불구하고 애증의 갈등 속에서 비참한 생을 마쳤다. ⓒ
코발레프스카야는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No, mathematics was my hiding place. We were still not living together and I was very nervous and withdrawn. I would stay at my desk, pace and return to work for days."
"아닙니다. 수학은 내가 쉴 수 있는 피난처(안식처)입니다. 우리는 계속 같이 살지 않았고 나는 신경이 예민했고 깊이 움츠려 들어 있었죠. 나는 며칠 동안이나 서재에 머물면서 걸어 다니다가는 일터로 가곤 했지요." 여기서 피난처라고 한 것은 남편보다 수학이 더 좋았다는 의미로 해석하기 바랍니다.
그녀의 대답은 다시 이어집니다. "My only recreation was long walks when Vladimir visited. When I returned to Russia I felt released from the prison in which my best thoughts were in bondage. You cannot think what suffering it is to have to speak always foreign languages to your friends. You might as well wear a mask on your face."
"남편이 방문했을 때 유일한 즐거움은 오랫동안 산책하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 나의 가장아름다운 사고를 구속했던 감옥에서 해방된 느낌이었죠. 절친한 친구들에게 외국어로 말해야만 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상상할 수 없을 거예요. 얼굴을 전부 가리는 게 좋을 정도죠."
기자는 자살로 생을 마친 남편의 죽음이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질문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As with any suicide, I had guilt. I still feel somewhat responsible because Fufa and I left Russia and returned to Berlin during the terrible period and his sad end."
해석하면, "어떻게 자살했던 죄책감을 느낍니다. 나는 여전히 어느 정도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남편과 나는 러시아를 떠났으나 최악의 상황 속에서 그가 생을 마감하자 베를린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돈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정유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하자 엉망이 됐고 가난 속에서 남편은 자살해서 죽습니다. 이로 인해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이어지는 마지막 대목을 유심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In an attempt to rid myself of this feelings of guilt, I immersed myself in the mathematical world once more, my hiding place. 나는 이러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피난처인 수학에 다시 한번 몰두하곤 했습니다." 수학에 얼마나 대단한 집착이 있었는지 짐작하시겠죠? 남편에 대한 죄책감도 수학이 해결해 주었던 겁니다.
영혼을 노래한 수학자의 이미지와 달리 성격은 괴팍하고 지독히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았지만 돈이 궁해지자 아기를 돌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막심(Maxim Kovalevsky)이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집니다. 건장하고 뚱뚱해서 ‘Fat Maxim’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에 대한 애칭이죠. 막심은 변호사, 역사가, 사회학자로 돈도 많았고 사회적인 명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고 술회합니다.
"Neither of us can go back to Russia for living. I am never happy with him. We have many fights and I often become jealous and possessive and move quickly from love to anger. He mostly teaches at universities in France and often leaves me."
"우리는 결코 러시아(고향)로 갈 수 없는 처지였지요. 저는 그와 결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많이 다투었고 저는 자주 질투심이 생겼고 소유욕이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증오로 자주 변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대학에서 강의를 자주해서 저와 떨어지곤 했지요" 보충 설명하자면 여기서 질투와 소유욕이란 애인인 막심이 다른 여자들과 사귀기 때문에 생기는 여성의 시기심을 이야기합니다.
"I feel abandoned when we are apart. He seemed to just turn up when I won the Prix Bordin. Even with my honors, I was unhappy because of him.” 헤어져 있을 때는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이었죠. 그(막심)는 내가 보르댕상을 받았을 때 나타났습니다. 내가 받은 여러가지 영광에도 불구하고 저는 막심 때문에 불행했습니다.
천재 여성 수학자 코발레프스카야의 애인 막심에 대한 애정과 분노, 그에 따른 좌절은 대단했습니다. "Letters of congratulations were pouring in from all sides, but I was as miserable as a dog. No, I hope, for their sake, that dogs cannot be as unhappy as human creatures, especially not women."
"(보르댕상을 받았을 때) 여러 곳에서 축하편지가 쇄도했지요. 그러나 저는 개만큼이나 불행했습니다. 희망을 찾을 곳이 없었죠. 개들도 창조물인 인간, 특히 여성만큼 불행할 수는 없을 겁니다." 여성을 복수인 women으로 쓴 걸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남성의 사랑에서 멀어졌을 때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은 비참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겁니다.
▲ 코발레프스카야는 난해한 수학을 시와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
그녀의 생을 빼앗아 간 폐렴을 앓기 시작한 것은 애인 막심과 결별을 선언한 지 이틀 만의 일입니다. 그 스트레스로 바로 독감을 수반한 폐렴을 앓습니다. 그래서 그 병으로 세상을 하직합니다. 수학에 그렇게 대단한 정열을 쏟았던 오늘의 주인공도 애인의 변심에는 어쩔 수가 없었던 건가요? 애인과의 결별과 폐렴은 각기 서로 다른 건데 후세 사람들이 각색한 건 아닌가요?
어쨌든 그녀는 남편 블라디미르와 결혼해 베를린대학에서 수학을 배우고, 1874년 유럽 수학의 본거지인 괴팅겐 대학에서 편미분방정식론, 제3종 아벨적분, 토성의 고리모양 등에 관한 세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귀국 후 남편과 실질적인 결혼생활에 들어갔으나 남편은 곧 사업실패로 자살하고 맙니다.
그 후 1884년 스톡홀름대학의 초청을 받아 교수로 갑니다. 최초의 여성 수학교수가 된 것이죠. 그 곳에서는 ‘고정점(固定點)을 둘러싼 강체(剛體)의 회전에 관한 논문’으로 1888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학술원)로부터 권위 있는 보르댕상(Bordin Prize)을 받습니다. 자서전적 소설 ‘라에프스키가(家)의 자매’ 등의 문학작품도 남겼습니다.
그녀의 수학적 재능은 너무나 특이해 그녀의 어린 시절 침실 벽이 러시아의 한 수학자의 강의 노트로 도배가 되어 있을 정도였다는 이야긴 들어보셨죠? 그래서 독일에서 미적분학 공부를 정식으로 시작할 때 그녀는 이미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고 합니다. 소설에 소질이 있었던 그녀는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와도 친밀했다고 합니다.
‘문장출어빈궁(文章出於貧窮)’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훌륭한 글은 가난 속에서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글 쓰는 선비는 모름지기 청렴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글 재주 좋은 한 양반이 나중에는 이 말을 ‘빈궁출어문장(貧窮出於文章)’으로 바꾸어 ‘글을 쓰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라고 적어놓았고 많은 사람이 또 이를 인용했습니다. 그래서 ‘글 잘하면 빈복하다’는 말도 생긴 겁니다.
요는 수학을 예술로 승화시킨 코발레프스카야의 명언과 그녀의 일생을 접하면서 ‘과연 천재란 불행이라는 업보를 짊어지고 태어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코발레프스카야도 불행한 삶을 살았겠지만 남편 블라디미르도 참 고생했을 것 같네요? 그렇지 않나요? 결혼했으면서도 아내처럼 살아주지 않았던 코발레프스키야에 대해 남편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자이로스코프 방정식을 명확히 해결해 남성을 뛰어 넘은 수학자.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원치 않은 위장결혼까지 마다하지 않은 천재 수학자. 애인에게 버림받은 여성. 수학의 최고봉의 지위에서 50을 넘기지 못한 채 세상을 하직한 비운의 여성 수학자.
천재 여성 수학자에게 현명한 아내, 자상한 어머니의 모습을 요구하는 것은 애당초부터 잘못된 가설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시를 노래하며 수학을 예술의 경지까지 이끌어낸 코발레프스카야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존경하는 겁니다.
You can be trapped in do-your-best nonsense. Perhaps there are some significant cases when you truly want to do your best. But in the vast majority of activities, having to do your best, or even having to do well, is an obstacle to doing.
Don't spoil potentially pleasurable activities because of perfectionism. Try changing' Do your best" to simply "Do". If you have perfect standards for yourself, you won't do much because PERFECT is not a concept that applies to human beings. God can be perfect, but you, as a person. need not apply such ridiculous standards to your behavior. (2007년 3월 고 3 전국 연합평가 문제 33번 문제)
당신은 최선을 다하라는 어리석은 소리에 사로잡힐 수가 있다. 아마도 당신이 진정으로 최선을 다하고 싶은 중요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방대한 대다수의 활동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 혹은 단지 잘해야만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하는데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잠재적으로 즐거울 수 있는 활동을 완벽주의로 인해 망치지 마라. '최선을 다하라' 하는 것을 그냥 단순히 '하라'로 바꿔라. 만약 당신이 당신 스스로 완벽한 기준을 내세운다면, 그것이 인간에게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은 많은 것을 해낼 수가 없을 것이다.신만이 완벽할 수 있다. 당신은 인간으로서 당신 행동에 그런 불합리한 기준을 적용할 필요는 없다.
내 자신에게나 아들에게 또는 주변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라' '최선을 다했는가?'라고 간혹 묻곤 한다.
시간이 있을 때 장미 봉우리를 거두라 / 낡아가는 시간은 지금도 사라지고 있고 / 오늘 미소 짓고 있는 이 장미꽃도/ 내일이면 지고 마나니.
키팅: 시간이 있을 때 장미 봉우리를 거두라. 이걸 라틴어로 표현하면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고 하지.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 믹스: 카르페 디엠, 그건 현재를 즐기라(Seize the day)는 말입니다.
키팅: 현재를 즐겨라, 지금 장미 봉우리를 거두라, 왜 시인이 이런 말을 썼을까? 찰리 : 그건 시인이 성질이 급해서요. 키팅 : 땡, 대답에 응해준건 고맙네. 그 이유는 우리는 모두 구더기의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이 방에 있는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숨이 멎고 차가워져서 죽게 되지. 이쪽으로 와서 과거의 얼굴들을 지켜봐......그들의 눈도 너희처럼 희망에 가득 차 있지. 세상을 손에 넣어 위대한 일을 할거라 믿고 있지, 지금의 너희들처럼......이 사람들은 죽어서 땅에 묻힌지 오래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잘 들어보면 그들의 속삭임이 들릴 것이다. 자, 귀를 기울여 봐, 들리나? 카르페, 카르페,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 독특한 (Extraordinary) 너의 삶을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