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성술이나 점쟁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은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흔히 이것을 "우물효과"라고 부릅니다.(신비의 사기꾼들, 궁리)
우물효과란 어떤 말이 애매하면 애매할수록 -즉 우물의 깊이가 깊을수록-그것을 듣는 사람은 이말가운데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더 많이 발견하게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또는 정신과학에서 말하는 "바넘효과"라고도 합니다. 예컨대 국내 종합일간지나 스포츠지에 소개되고 있는 오늘의 운수(혹은 운세)난을 살펴보면 ‘모든 것 중에서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먼저 베풀면 그 이상의 보답을 받는다’‘오늘의 고난은 내일의 행복이다’ 등의 문구가 단골 메뉴로 등장합니다. 이같은 해설은 성인이라면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이고그래서 이 운수난을 보는 사람은 “아주 잘 맞는다”고 대답한다.이런 대답을 유도하는 것을 바넘효과(Barnum effect)라고 부릅니다.바넘(P.T.Barnum)의 “매분마다 기생충이 태어난다”는 유명한 말을 기념한데서 붙여진 말인데 어차피 해로울 것이 없기 때문에 그 언어에 우호적이거나 믿게되는 심리현상을 바넘효과라 부르게 된것입니다.
점쟁이가 이것저것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것으로 보이는 애매한 일반적인 말과 구체적인 말을 함께 해줄 때에 구체적인 말의 부정확성을 깨닫지 못한 채 일반적인 말을 자신이나 알고 있는 사람에 해당된다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우물효과적인 말은 아래와 같습니다.
ㅇ 당신은 다른사람들의 따뜻한 애정을 필요로한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 스스로에게 매우 비판적이다.
ㅇ 당신은 성격상 몇가지 약점이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당신을 그것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
ㅇ 당신의 소망들중 몇가지는 매우 비현실적인 것들을 가지고 있다.
ㅇ 당신은 외적으로 자기절제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매우 걱정이 많고 확신이 없을때가 있다.
ㅇ 당신은 때로는 외향적이고, 상냥하고, 사교적이지만 때로는 내성적이고, 신중하고, 소극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페르세폴리스는 이란혁명기에 어린시절을 보낸 소녀가 이슬람 여성으로서 자아와 사회에 대해서 발언하는 성장을 다룬 만화책이다. (근사하게 표현하면 그래픽 노블이다.)
조 사코 의 "팔레스타인"이나 "고라즈데" 슈피겔만의 "쥐" 같은 책을 좋아했던 나는 2권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지난달 15일 발행되자마자 교보문고에서 주문해서 보았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걸작이다. 필독의.."
이 책의 저자인 마르잔 사트라피는 1969년 이란의 라쉬트라는 도시에서 태어나 수도인 테헤란에서 자랐다. 그녀는 이란 왕실의 후손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는데 그녀의 할아버지는 공산주의자로 옥중에서 죽었으며, 부모들은 팔레비왕의 절대왕정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는등 진보적인 집안에서 자라난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당당한 여성으로 자라나게 하기위해 많은 책을 사다주었으며 책을 통해서 사회와 진보에 눈을 뜨게 된다.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책은 '변증법적 유물론' 에 관한 만화였는데 마르크스와 하나님이 닮았다고(생김새가.. 그러보니 닮은 것도 같다. ㅋㅋ) 생각할 정도였다.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팔레비왕조가 무너지는 혁명은 왔지만 혁명과 민주주의에 대한 들뜬 기대도 잠깐, 부패하고 타락했던 팔레비 정권 못지않은 폭압적인 이슬람 근본주의정권은 강력한 신권 통치 국가로 만들었고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은 처형당하게 된다.
그녀의 삼촌 역시 9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이란 혁명 이후 풀려난다. 삼촌은 "모든 혁명은 과도기를 거치게 돼 있다"고 말하면서 진보의 꿈을 놓지 않았으나 삼촌은 이슬람혁명정권에 의해서 처형당한다. 삼촌은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한 사람 면회가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마르잔을 부른다. "두고봐라, 언젠가 프롤레타리아가 세상을 지배할 거다." 삼촌은 끝까지 희망과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존경하고 좋아했던 삼촌은 죽었다.
그리고 1년 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침공한다. 이슬람정권은 전쟁을 핑계로 반대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한다. 마르잔은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이슬람공화국이 건립된후 이젠 더 이상 정치사범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에 "제 삼촌은 팔레비 시절에는 정치범이 3천명이었는데 호메이니가 집권하면서 정치범이 30만명으로 불어나게 되었다."라고 말하는등 마르잔의 부모는 마르잔의 정의감이 두려워한다.
그녀가 원리주의자들에게 강간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를 친척이 있는 스위스로 유학을 보내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안전했지만 영원히 이방인이었고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반복한다. TV에서 조국의 전쟁뉴스가 나오면 죄책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리고 운명적인 첫사랑을 만나게 되지만 시련을 겪게되고 이로인해 약물중독으로 죽을 고비를 맞이하기도 한다.
그녀는 이방인일 수 밖에 없는 그곳을 떠나서 다시 이란으로 돌아온다. 이란은 이라크와의 8년간의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조국은 거리 곳곳이 순교자의 이름으로 뒤덮힌 공동무덤으로 변하고 말았다. 한때 독재정권과 싸웠던 정치범들은 휴전직전 그들의 전향 요구를 거부하고 대부분 처형을 당했다.
그녀는 거기에서 두번재 사랑을 만나 결혼했으나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은 결혼 바로 다음날 깨닫게 된다. 다시 찾은 이란에서도 그녀는 이방인이었다. 그녀의 친구들은 "서양물을 먹은 창녀"쯤으로 여겼다.
그리고 혁명정권의 이상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이란에서는 정치적 반대자를 찾아 볼수 없었으며,독재정권의 공포정치는 민중들 자신이 얼마나 억압받고 살고 있는지 깨닭을 수도 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녀는 이혼후 다시 그녀는 프랑스로 떠나게 된다. 엄마는 그녀에게 공항에서 "이번에 넌 영원히 떠나는 거야. 넌 자유로운 여자다. 나는 네가 여기에 다시 오는 것을 금지한다."라며 작별인사를 고한다.
이 책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이번달에 스폰지에서 배급예정으로 되어 있다. 이 영화는 2007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 2007 벤쿠버국제영화제 인기상 수상, 2008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작품상 노미네이트되기도 하였다.
눈에 띄기 어려운 이 책을 발견해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다. 여러분들도 그런 행운의 기회를 놓치지 마시길..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이란 출신 만화가인 마르잔 사트라피가 이슬람 혁명기의 어린 시절을 만화로 그려냈다. 헌신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이란 왕조의 위대한 후손임을 자부하는 저자가 여섯 살부터 열네 살까지 테헤란에서 보낸 삶을 강렬한 흑백 이미지들로 보여 준다. 샤 정권과 이슬람 혁명, 모든 것을 황폐화시킨 이라크 전쟁까지 격정적인 시기에 진보적 지식인 가정에서 자란 사트라피가 경험한 이란의 사회상이 담담
차도르를 쓴 펑크 소녀는 어떻게 성장하였을까? 이슬람 혁명과 이란 이라크 전쟁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마르잔 사트라피의 성장 보고서. 자신과 조국에 대한 거침없고 지적인 저자의 증언이 강렬한 흑백 이미지의 일러스트 만화로 표현되어 펼쳐진다. 이슬람 혁명과 이란-이라크 전쟁, 그리고 가부장적 관기로 초토화된 조국의 현실과 여성 민중들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섬세히 어루만진 제1편의 연장선인 이 책에서 저
<녹색평론>의 김종철 선생은 ‘선거가 민주주의를 보장해 주는가’에 대해 회의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선거 이외의 다른 방식은 없는지, 설령 없다고 하더라도 선거가 마치 ‘민주주의의 축제’처럼 여겨지는 것은 온당한 것인지 살펴보자는 의견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지난 20년 동안 대통령 직선제를 해왔고 선거 후에는 늘 막대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물론 지방자치 선거까지 거의 해마다 치러지는 선거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각급의 모든 후보자들이 거창한 개발 공약을 내걸게 되고 바로 그 공약 때문에 임기 동안 엄청난 재원 낭비와 필연적인 환경 파괴가 잇따른다는 것이다.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가 전라도 지역 표를 얻기 위해 내걸었던 새만금 사업이 재앙으로 변하였고, 1997년 대선에서도 모든 후보가 이를 바로잡지 않았으며 2002 대선에서는 노무현 후보가 수도 이전을 내세워 어떤 의미로든 ‘개발’ 공약으로 당선되었고, 2007 선거에서는 이명박 후보가 이제까지 경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한반도 대운하 공약을 내걸어 당선되었으니 앞으로 이 한반도는 거대한 공사판이 되고 말 것이다.
지역구 의원들도 저마다 ‘개발’ 공약을 내세운다. ‘보존’하거나 ‘유지’하거나 ‘지켜낸다’고 호소하는 후보는 단 하나도 없는 셈이다. 선거가 아니었으면 내세우지 않아도 될 ‘불필요한 개발 공약’이 오로지 선심성 출사표로 남발되니, 그야말로 모든 것이 공허한 ‘공약’이 되기를 바라는 게 나을 정도이다. 이런 판국에 지난 대선에는 바로 그런 '거대 공약'을 통하여 당선된 쪽에서 바로 그 '공약'을 이번 총선에서는 슬그머니 뒤로 물렸으니, 제발 그것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니까 선거가 정말로 지역 주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한 나라의 방향을 설정하며 민주주의의 축제가 되는지 한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오랜 친구였고 다정한 벗이었다. 앞으로도 그렇다."
조지 부시가 자신의 오른팔인 칼 로브 백악관 정치고문이 사임하는 자리에서 밝힌 말이다. 리크게이트(극비 사항인 CIA 요원 신분 노출 파문)로 정적의 공격을 받아 백악관을 떠나게 된 칼 로브에 대해 부시는 공개적으로 열렬한 지지를 표현한 것이다.
'로브가 결정하면 부시가 행동한다'는 풍자를 나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을 행사한 칼 로브 정치 고문(오른쪽)
칼 로브는 누구인가? 그는 2000년과 2004년 대선에서 부시가 승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후 그는 ‘로브가 결정하면 부시는 행동한다’는 비아냥을 들을 만큼 선거 전략가에서 멈추지 않고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기자회견을 마친 부시는 사임하는 칼 로브를 위해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 원까지 빌려줬다.
부시 곁에 칼 로브가 있다면 그의 정적 클린턴 곁에는 딕 모리스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대통령을 만든 최고의 전략가이지만 스타일은 서로 다르다. 1947년, 칠삭둥이로 태어난 딕 모리스의 별명은 ‘무서운 아이’ ‘고용된 총잡이’이다. 모리스보다 1년 뒤에 태어난 로브의 별명은 ‘천재 소년’, ‘쓰레기장의 개’이다. 무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온갖 선거 전략을 기획하는 최고 전략가다운 별명들이다.
두 사람 모두 네거티브 캠페인을 망설이지 않았다. 오히려 네거티브 전략을 공세적으로 이끌었다. 모리스가 1996년에 클린턴을 재선에 성공시킬 때 쓴 공격 방식은 이른바 삼각주(triangulation) 전략. 삼각형 위의 정점에서 아래 밑변의 양 꼭지점(정치적 좌우 관계)의 장점만 뽑아서 활용하는 것이다. 이 전략에 의해 ‘균형 예산’ 개념이 탄생했다.
최고의 선거 전략가에서 막강한 권부 실력자로 등극한 칼 로브는 조지 부시를 두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시켰다. 모리스가 번득이는 아이디어로 충만한 전략가라면 칼 로브는 마치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조금씩 후보의 약점을 장점으로 바꿔가는 전략가이다. 2004 재선을 목표로 한 부시 대통령은 칼 로브의 권고에 따라 재임 기간 내내 2000년 대선 때의 격전지를 자주 방문하였다.
딕 모리스와 칼 로브 이전에도 놀라운 지략가가 있었다. 1992년 대선 때 “바보야 문제는 경제란 말이야”(It's the econmy, stupid!)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아칸소 주의 시골뜨기 주지사 클린턴을 백악관으로 인도한 제임스 카빌이 그 사람이다. 스핀 닥터((Spin Doctor), 즉 대규모 선거에서 미디어 홍보를 총괄하는 전략가의 대표자이다.
제임스 카빌과 그의 아내
카빌의 전략은 한마디로 ‘모든 것을 단순화하라’는 것이다. 미디어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선거전에서 지하철 노선처럼 뒤엉킨 음모나 천재가 아니면 기억하지 못할 복잡한 수치를 열거하는 것은 패배의 지름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제임스 카빌은 전체적인 선거 전쟁에서는 다양한 이슈를 치밀하게 분석하되, 생방송 토론회라는 구체적인 전투에서는 모든 이슈를 단순화하여 강한 이미지를 남기는 방식으로 싸웠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란 말이야’라는 유명한 메시지는 세계 최강대국의 면모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불황에 빠진 90년대의 미국인들에게 강렬한 호소력을 발휘하였다.
클린턴의 대선 승리를 이끈 후 카빌은 영국, 캐나다, 이스라엘, 볼리비아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수상, 이스라엘의 헤후드 바락 총리, 멕시코의 에르네스토 세디요 대통령, 에르네스볼리비아의 산체스 드 로자다 대통령이 그의 도움을 받았다. 1992년 대선 때, 카빌은 클린턴을 도왔고 그의 아내는 공화당 후보의 전략가로 활동했다. 밤에 침대를 함께 썼지만 낮에는 상대방의 진영에서 활동하는 ‘진정한’ 프로들이었다.
2004년 11월 14일에는 NBC 방송에서 출연해서 자신의 이마에 달걀을 깨트리기도 했다. 그해 민주당 대선 후보로 존 케리 상원의원이 당선될 것이라고 장담했는데 이 예측이 빗나가자 일부 지지자들로부터 달걀 세례를 받았다면서 스스로 자신의 얼굴에 달걀을 깨뜨려 보였던 것이다. 그 장면을 본 시청자들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존 케리라는 정치가 이름은 잊어버려도 제임스 카빌이라는 진정한 프로의 이름만큼은 생생하게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런 ‘프로들’이 정교하게 구성하고 치밀하게 밀어붙이는 것이 바로 선거이다. 물론 그 모든 정황들에도 불구하고 선거는 여전히 달리 대안이 없는 효과적인 방법이고, 주어진 ‘정치 상황’이기 때문에, 이에 즉하여 사태를 판단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하지만 선거가 민주주의의 근간이라고 쉽게 믿어 버리는 순간부터 사실상 선거는 ‘프로들’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는 점을 의식해야만 한다. 선거를 ‘프로들’에게 통째로 넘기지 않으려면, 해마다 치러지는 이 대규모 행위에 대해 근원적인 성찰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다.
2007년 봄에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다섯 차례에 걸쳐 진행했던 ‘선거로 본 한국현대사’ 강의를 정리한 책이다. 강연체와 구어체를 살려 정리했기 때문에 쉽게 읽힌다. 서중석 선생은 선거가 때로는 민의를 왜곡하고 시대의 흐름을 뒤처지게도 하였으나 결국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 우리 사회의 희망이 되살아나는 분수령이 되었음을 역설한다. 서중석 선생은 4월 26일, 홍대앞에 위치한 '풀로엮은집'에서 이 책의 독자들과 시민들에게 특강을 가질 예정이다. /정윤수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선거
선거는 민주적인가 | 버나드 마넹 지음 | 곽준혁 옮김 | 후마니타스
선거는 대의 민주주의에서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하지만 선거권이 확장되고 절차가 제도화 되었음에도 바로 이 때문에 ‘형식화’된 선거가 민주주의를 왜곡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가? 뉴욕대 정치학과 버나드 마넹 교수의 이 책은 고대와 근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선거 ‘제도’의 양면성을 해부한다. /정윤수
꾼들이 판치는 미디어 선거 시대
밥 로버츠 | 감독 주연 팀 로빈스
할리우드는 종종 자신들의 선거를 비판적으로 다룬 ‘정치 영화’를 만들어왔다. <밥 로버츠>는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스타일로 영화로 사태의 본질에 육박하지는 않지만, 무엇이 문제인지는 무난하게 알려준다. 아메리카 드림을 성취한 신보수주의자, 우리로 치면 ‘뉴라이트’에 ‘실용성’까지 겸비한 밥 로버츠. 그 주인공까지 맡은 감독 팀 로빈스는 이 혐오스러운 ‘매력남’의 선거 유세 과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스케치하면서 90년대의 미국 사회를 유쾌하게 조롱한다. /정윤수
신의 존재를 의심하라, 인간의 능력을 주목하라! 신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인간의 본성과 가치를 탐색하는 세기의 문제작! <만들어진 신>은 신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인간의 본성과 가치를 살펴보는 책이다. 과학과 종교계에 파란을 일으킨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의 최신작으로, 미국의 광적인 신앙을 비판하며 무신론자의 자긍심을 높이고자 했다. 저자는 신이 없음을 주장하면서, 오히려 신을 믿
오늘이 제주도 4.3항쟁이 벌어진지 6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노무현정권때에는 대통령이 직접 행사에 참여하여 지난 과거를 정부를 대신해서 사과한 적이 있지요.
이제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모두 과거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잊혀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역사를 되돌리려는 시도도 눈에 보입니다.
속칭 '제주 4·3사건 왜곡을 바로잡기 위한 대책위원회'는 31일 진정서를 통해 "제주 4·3 진상조사보고서는 허위로 작성됐으므로 즉시 폐기되어야 하며, 18대 국회에서 제주 4·3특별법을 폐기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제주시 봉개동 12만평에 993억원을 들여 건설한 평화공원(폭도공원) 준공식을 3일 하려하고 있다"며 이승만대통령을 악마로 묘사한 사료관을 개관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4.3항쟁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단연 이산하의 한라산입니다. 군사정권의 발악이 극에 달했던 87년봄에 '녹두서평'이라는 무크지에 실렸던 이 시는 당대의 청년들의 피를 끓게 했던 시였고, 어두운 시대의 역사를 전면으로 등장시킨 사건이었습니다.
이 시때문에 시인은 2년동안 옥살이를 하게 되는데 김지하이후 최대의 필화사건으로 문학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다음과는 헌사로 시작됩니다.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제주도에서 지리산에서 그리고 한반도의 산하 구석구석에서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장렬히 산화해 가신 모든 혁명전사들에게 이 시를 바친다!
녹두서평은 이후 금서가 되기도 했습니다. 학창시절에 책을 사는 것도 읽는 것도 쉽지 않았던 그 시절 '녹두서평'은 '전환시대의 논리'나 '맑스'만큼 저의 지성에 큰 영향을 미친 책입니다.
화약냄새보다 더 강한 시의 향기를 뿜어냈던 서정시인이자 여성운동가로서 짧고 정열적으로 살다 불의의 사고로 타계한 고정희의 유고시집. 여기에 실린 <밥과 자본주의>, <외경 읽기> 연작, 통일굿마당시 등은 기독교적·민중적·여성해방적 시각으로 민족통일과 민중해방에 대한 희망과 투쟁을 노래하고 있다. 시인 화보 및 연보 수록.
지난달 후배들과 함께 홈페이지 개편관련 모임을 하면서 웹2.0의 체계 또는 이념을 가지자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웹2.0을 설명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흥미있어 한 부분이 바로 RSS였습니다. RSS는 Really Simple Syndication의 약자로서 "정말로 간편한 발행"을 돕는 인터넷도구입니다.
RSS를 글로 설명하면 개념을 잡기 어려운데 막상 사용해보면 그렇게 편안한 "물건"이 없습니다. 인터넷 사용의 신세계가 열린 느낌이랄까! 웹2.0의 꽃이라 불리울만합니다.
RSS는 블로그 또는 웹에서의 최신 글 목록을 RSS 파일로 '발행'하고 그 글들을 '구독'하는 사람들은 그 파일을 받아다 열어보는 것만으로도 최신 업데이트 상황을 확인하고 새로 올라온 글을 불러들일 수 있다. RSS는 '발행'과 '구독'이라는, 정보를 수집하는 전혀 다른 유형을 만들어 냈다. RSS 주소를 수집기에 걸어두면 100개든 200개든 관심있는 블로그의 최신 글 목록을 한꺼번에 받아볼 수 있다. 하나하나 직접 찾아가 열어볼 필요가 없게 된다는 이야기다. RSS는 이밖에도 여러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를테면 RSS는 콘텐츠가 사이트의 구속에서 벗어나게 됐다는 걸 의미한다. 사이트를 벗어난 콘텐츠는 얼마든지 변형 가공돼 다양한 형태로 다시 발행될 수 있다. (이정환의 글중에서)
혹 지금까지 RSS리더기를 사용하지 않으신 분들은 한RSS를 사용해보십시요. 처음에는 그들이 제공하는 블러그나 사이트 중심으로 글들을 수집하고 익숙해지면 스스로 서핑하면서 목록을 만들어 보면 됩니다. 인터넷 세상에서 샛방같은 네이버를 떠나 인터넷의 광대한 정보의 바다로 떠날수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홈페이지가 네이버를 벗어 난지 오래죠.
그때 모임에서 읽어 보았던 글이 이정환닷컴의 "이것이 웹 2.0이다." 이였습니다. 웹2.0은 매우 모호한 개념입니다. 어떤 특정한 경향이나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자유로운 정보공유와 참여라는 인터넷 초창기 정신으로 돌아가자"정도라고 포괄적인 경향이라 할 수있습니다. 그때와 다른 것은 기술의 발달이 우리가 상상한 것들을 이루어 낼수있다는 것 입니다.
지금의 인터넷세상은 상업적인 기업들이 모두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네이버에 우연히 실린 것 같은 정보도 실상은 수많은 돈이 오가는 거래의 산물입니다. 어떤 정보는 돈을 내지 않으면 아예 접근조차 가로막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이 세상에 모든 정보와 지식들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온 공동사유의 산물입니다. 그래서 정보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누구나 접근 가능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은 이러한 길을 열어놓았고 이렇게 만들어진 길들은 자유로운 정보와 의견들을 교류하게 해야합니다.
이러한 이상적인 모델에 가장 근접한 사이트가 바로 위키피디아입니다. 위키피디아는 하와이 원주민들의 말로 '빨리'라는 뜻의 '위키'(wiki)와 '백과사전'(encylcopedia)의 합성어입니다. 보통 위키라고 줄여서 불리웁니다.
위키는 보통의 웹 게시판과 달리 로그인을 하지 않고도 누구나 쓰고 고치고 지울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불특정 다수가 참여하여 만드는 온라인 백과사전입니다. 위키는 사용 방법도 매우 간단하고 쉽습니다. 누구나 '수정' 버튼만 누르면 글을 수정할 수 있고 글 가운데 링크를 만드는 것도 매우 간단합니다. 해당 단어가 설명되어있는 페이지에 들어가서 우리는 백과사전에 대한 글을 쓰거나 고치거나 지우거나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이렇게 고치고 다듬고 하다 보면 조금씩 더 완벽하고 풍성한 정보가 됩니다.
이런 시스템을 도입한것은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면 더 정확한 정보가 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지식들은 소수의 특정 전문가에 의존에서 편집하는 것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지식을 생산하고 그들 스스로 공유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공정하고 정확한 컨텐츠를 생산하는 믿음때문입니다.
위키피디아의 창립자인 짐보 웰리스와 래리싱어는 인터뷰에서 " '낙태'에 대한 글에서 '낙태는 불법이며 여성에게 해롭다. 낙태외에도 다른 선택이 있다'는 내용이 있으면 금방 지워진다. 공정한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검증과정은 10분 이상 걸리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공정성과 정확성, 그리고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풍부한 정보의 양은 오프라인의 백과사전의 대명사 브리태니카가 절대 따라올 수 없는 부분입니다.
눈치가 빠르신 분들은 금방 알아채셨겠지만 이런 시스템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이상사회에서의 역할과 비슷합니다. 정보를 생성하는 생산수단의 공유와 누구나 필요한자에게 공급되는 시스템에서 말입니다. 엄격히 말해서 디지털시대의 정보는 분배라는 용어보다 더 강력한 공유라는 개념이 더 적절합니다. 즉 생산수단과 생산물 모두를 공유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현실 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기 어렵겠죠. 무엇보다도 디지털정보는 무한이 복제되지만, 현실사회에서의 생산물은 유한한 자원, 인력, 자본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겠지요.
2008년 3월 현재 위키피디아에는 영어로된 문서가 226만개가 올라와 있습니다. 그에 비해 한글문서는 5만5천여개가 밖에 올라와 있지 않습니다. 정보의 양은 바로 그 언어가 지니는 힘의 양을 뜻합니다.
"영어가 중요한 것은 중요한 정보의 상당수가 영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어를 굳이 경쟁력이라는 관점에서 보려면, '그 정보에 어떻게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접근을 보장 하느냐'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 쉽게 말하면, 과학과 기술, 경제와 경영, 예술과 문화의 영역에서 '경쟁'을 하는 데에 요구되는 외국어 정보를, 신속하게, 효율적으로, 그리고 적절하게, 그것을 필요로 하는 개인이나 집단에 제공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기술적, 사회적 공학의 문제다." 라고 진중권은 말했지만 위키피디아야말로 이런 역할을 충분히 할수 있는 강력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영어가 중요한 것은 중요한 정보의 상당수가 영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어를 굳이 경쟁력이라는 관점에서 보려면, '그 정보에 어떻게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접근을 보장 하느냐'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 쉽게 말하면, 과학과 기술, 경제와 경영, 예술과 문화의 영역에서 '경쟁'을 하는 데에 요구되는 외국어 정보를, 신속하게, 효율적으로, 그리고 적절하게, 그것을 필요로 하는 개인이나 집단에 제공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기술적, 사회적 공학의 문제다.
혁신은 사유에서 나온다. 인간은 모국어로 사유한다. 아무리 영어에 능통해도 사유는 한국어로 하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일단 자기 언어로 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확장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끊임없이 외국어로 된 최신의 정보들을 입력할 채널을 만들어야 한다. 한 마디로 이는 국어로 된 데이터베이스를 소유한 국어 사용자와, 외국어로 접근 가능한 정보 사이에 효율적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하는 문제로 사고해야 한다.
영어로 된 새로운 정보를 검색하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중요한 것을 필터링하고, 거기에 접근할 유저 인터페이스를 구축하며, 중요한 자료는 한국어로 번역, 축적하여 모든 이에게 접근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현 정부는 한국과 영어의 접점에서 정보의 검색, 선별, 전송을 담당할 기술인력, 번역과 통역을 담당할 어학인력은 얼마나 필요한지, 또 그들을 어떻게 양성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프레시안에 좋은 글이 실렸군요. 현재 경기도에서 원어민 교사로 일하고 있는 제이슨 토마스 씨의 글입니다.
오륀지여사의 천박함보다 아이들과 교육을 생각하는 그의 놀라운 지성과 통찰력에 존경을 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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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E(Teaching English in English, 영어로만 진행하는 영어수업)"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영어 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돼 온 영어 교수-학습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요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영어 공교육 완성 실천방안" 발표로 "TEE"라는 구호가 한창 요란스럽게 한국 사회에서 이야기되고 있는데, 마치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면 영어 교육과 대한민국의 교육 문제가 모두 해결될 듯한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에 대해서 몇 가지 점을 분명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못 따라가는 아이들을 다른 곳에 숨겨 놓고 진행한 영어 수업
먼저, 짧은 일화 하나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2004년 제가 인천의 어느 중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연구 시범수업이 아주 야심있고 유능한 영어교사에 의해서 진행되었습니다. 학부모, 교사, 인천시 교육청 관계자들이 그 연구 수업을 참관했습니다. 그 수업은 영어로만 진행되어지는 수업이었고, 성공적인 수업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수업에서 배제된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언급이 없었습니다. 2명의 학생은 그 전체 수업시간을 제가 있는 사무실에서 숨어서 그 연구수업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그 연구 수업에서 배제되었습니다. 그들이 연구 수업에 참여하는데 필요로 하는 영어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학생이 꺼낸 단어는 'disaster(재해)'
그러나 그들은 제게 그 상황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있는 영어 사전을 사용해서 그들이 원하는 단어를 찾아냈습니다.
그 단어는 바로 "재해(disaster)"라는 단어였습니다. 매우 적당한 표현이었습니다. 영어를 가장 필요로 하는 그들을 고의적으로 배제하고,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구 수업. 그것이야말로 저에게는 비참한(disastrous) 재난과 같은 상황으로 느껴졌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것이 바로 TEE(Teaching English in English)입니다.
최신 이론은 교육 현장의 실정을 강조하는 것…한물 간 이론에 집착하는 인수위
TEE(영어로만 진행하는 영어수업)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 흐름을 살펴보면, 이는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며, 오래전부터 연구되어 왔고, 연구 초창기에는 목표 언어(English)를 중심에 두고, 그 목표 언어(English)만을 수업시간에 사용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TEE 이론의 방향은 학교 교실 현장의 실정에 맞게 운영하는 것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만약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나 이명박 정부가 영어를 한국 사회에서 공용어로 만들고자하는 의도라면, 미국에서 나온 영어 공용어와 관련된 최근의 여러 연구물들을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분명 그들의 의도와는 다를 것입니다.
"모국어가 외국어 수업에서 완전히 배제돼야 한다"는 주장은 잘못
저는 아직까지 모국어가 외국어 수업에서 완전히 배제되어져야한다고 믿는 언어 학습 전문가를 한 명도 본 적이 없습니다.
영어 몰입 교육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보다 더 극단적인 입장을 이명박 정부가 취하고 있어 보입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제안된 영어 교육 방안은 학교 현장의 교실 수업에서도 적절하지 않은 교수 방법이며, 좀 더 크게 봐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위해서도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당연히 영어 수업시간에 한국어가 완전히 배제되어야한다는 생각, 영어 수업시간에 오직 영어로만 진행되어야한다는 생각에 분명하게 반대합니다.
"영어 수업에서 한국어의 역할은 중요하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학급 교실에서 영어 수업시간에 한국어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학생들의 영어에 대한 중압감을 들어줄 수 있고, 영어를 배우는 중간 언어로서의 한국어는 마땅히 있어야하며, 한국어의 개입은 교사, 학생이 한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동질감도 느끼게 해줍니다.
영어 학습에 있어서의 모국어는 많은 도움을 줍니다. 외국어 수업시간이라고 한국어의 사용 금지를 강요하는 것은 학생들의 진정한 배움을 금지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TEE는 많은 오류를 가지고 있습니다. TEE는 외국어 학습자의 모국어가 제2언어 습득에 방해가 된다는 잘못된 가정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학습자의 모국어가 외국어 학습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합니다.
"미국, 영국식 영어만 표준 영어인가?"…"천만에!"
그리고 TEE는 원어민(Native Speaker)가 최고의 영어 교사라는 잘못된 가정에도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영어는 매우 다양합니다. 그러나 TEE는 미국 영어(US English)가 표준 영어라는 이상한 논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계에는 여러 가지의 영어들이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Singlish(Singapore English), Jangnlish(Japanese English), Canadian English, Irish English, Indian English, Austrailian English도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Singapore English는 영어가 아니다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Korea'라는 말 자체가 '콩글리시'다.
▲ 한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영어마을'에서 아이들이 원어민 강사에게 영어를 배우고 있다. ⓒ연합뉴스
간혹 한국 사람들은 Konglish(콩글리시)라고 하면, 그것은 잘못된 영어라고 말합니다. Korea라는 말 자체가 바로 Konglish(Korean English)입니다.
애초 영어 단어 중에 Korea라는 영어 단어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Korea는 영어 단어가 되었습니다. OXford 영어 사전을 비롯한, 모든 영어 사전에 Korea가 나옵니다.
언어란 무엇일까요? 언어의 중요한 기능은 자신들의 문화를 전달하는 매개체입니다. 그 나라의 지식, 경험, 역사, 세계관, 관습, 노래, 음식, 철학. 이 모든 것들은 언어를 통해서 만들어지고 전달되고, 재생산됩니다.
영어는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의 도움을 받아왔고, 지금 현재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완성돼 가고 있는 것이 영어입니다.
'콩글리시'는 영어를 위해서도 소중하다
영어의 주인은 없습니다. 모든 나라들이 영어의 어휘를 풍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Oxford 영어 사전에 나오는 pansori(판소리), chaebol(재벌), ondol(온돌), kimchi(김치), hanbok(한복)과 같은 콩글리시(Konglish) 표현들이 바로 Korean English입니다. 한국어가 영어의 어휘를 더 풍성하게 한 것이며, 이는 세계에 있는 여러 나라들도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만약 TEE가 교실 수업에서 유일하게 강조된다면, 한국이 가진 여러 가지 문화적 재산들은 영원히 세계 여러 나라들이 만들어가고 있은 영어의 세계에 번역되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면 TEE 수업 시간에는 한국식 영어, 즉 한국말이 배제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pansori를 영어식 설명으로 대체할 것입니다.
"한국인이 모두 영어를 구사한다면, 한국 문화는 사라질 것"
저는 Konglish가 "대한민국"의 미래는 아니라하더라도, "Korea"의 미래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 한국어가 사라진 영어 교육의 현장에서 한국의 문화는 제시될 여지가 없습니다.
만약 한국인들 모두가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한국이라는 나라의 문화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고유한 한국어가 영어라는 언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국 주도의 세계화의 맹점입니다. 그들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한국 자체의 고유한 문화를 가지든, 그렇지 않든 관심이 없습니다. 미국의 영향력 아래 들어오면 되는 것입니다. 미국이 만든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면 좋은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란, 외국어 수업시간에 중간 언어로서의 한국어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일본어인 쓰시(sushi), 가라오케(karaoke)와 같은 일본어는 이미 영어 어휘가 된지 오래입니다. 영어화된 그 단어 하나, 하나가 바로 일본 문화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배제의 원리'에 기반한 TEE, 한국의 미래 위해서도 부적절
저는 TEE의 이데올로기적인 측면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TEE는 소위 말하는 미국의 엘리트(Elite) 교육을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바로 신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 논의되어 지고 있는 것입니다.
TEE가 전면적으로 강조되어진다면, 인천의 모 중학교에서 TEE 수업 시간에 배제되었던 2명의 학생들처럼, 아니, 2명의 학생들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배제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계의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영어는 덜 풍요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문화가 영어의 세계에 배제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TEE만의 강조는 영어 교수-학습법에 있어서도 적절하지 않으며, 한국이라는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자신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키면서, 세계화되는 그 방향이 지금 이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세계화(Globalization)입니다.
Xenophobia(제노포비아)는 외국의 것(사람 포함) 또는 낯선 것을 싫어하거나 두려워하 는 것을 말합니다. 유시민씨가 번역하여 내어 놓은 "유시민과 함께 읽는 유럽문화이야 기(푸른나무, 7000원) 1, 2", "신대륙문화이야기" 동유럽문화이야기"등 일련의 시리즈 물은 영국의 한 출판사가 펴낸 Xenophobe's guid를 변역한 것으로 반드시 일독을 권하 고 싶은 책입니다.
이들 책은 영국, 프랑스 독일등 유럽과 미국, 호주 뿐만 아니라 러시아 헝가리인들의 문화, 습관등이 재미있게 쓰여 있어서 한번 책을 잡으면 좀처럼 놓기 어렵습니다. 온 갖 유머와 해학, 재치와 경이, 두려움과 조롱으로 뒤섞여 있는 이 책의 내용은 정말 로 그 나라사람들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착각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입니다. 멀리있는 낮선이가 이웃처럼 친근하게 느끼도록 하고 있죠. 바로 이 책의 목적이 거기 에 있습니다. 낯설음의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에 대한 것을 잘 알고 있는 책이라는 생 각이 듭니다.
오늘같은 설레임과 두려움이 세월이 흐른후에 재미있는 추억처럼 되고, 가끔 흩으러 져있는 마음을 다스릴때 초발심으로 기억되야할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작 우리가 두려워 하는 것은 변화 그 자체가 아니라, 변화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다.",
누구에게나 친숙한 캐릭터였던 스머프가 탄생한지 50주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파파 스머프'와 '가가멜', '스머페트'와 '아즈라엘'등등 스머프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어린 시절 추억의 한편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1958년 벨기에 만화가 피에르 컬리포드에 의해 창조된 파란색 피부의 이 자그마한 캐릭터들은 한국에서 '개구장이 스머프'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것을 비롯해 25개 언어로 번역돼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스머프' 캐릭터의 판권을 관리하는 벨기에 IMPS 그룹은 14일 만화 속에 등장하는 '스머프 딸기 케이크'를 재현하는 것을 시작으로 스머프들의 실제 생일인 오는 10월 23일까지 다양한 50주년 기념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전에 화제가 되었던 글이 있었죠. 스머프공동체가 실은 공산주의사회를 은유한다고요.
다시한번 꺼내어 읽어 봅니다.
개구쟁이 스머프"에 나타난 사회-정치학적인 논제
읽으려면 아래 버튼을 ..
by J. Marc Schmidt
1) 서론
다음은 80년대 대부분의 시기동안 방송되었던 Peyo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관한 논설적인 분석이다.
"스머프"는 독특한 프로그램이다. 우선 이 프로그램은 만화이고 어린이들을 위해 제작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만화나 TV프로그램과는 달리 논쟁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스머프"는 몇몇 등장인물들의 모험보다는 한 사회집단과 사회 내의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작용, 사회와 외부인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나는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가 기독교에 대한 우화이듯이 "스머프"는 정치적인 우화라고 믿는다. "스머프"는 마르크스주의(Marxism)에 대한 우화이다. 그러나 나는 "스머프"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전복적인 선전물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당시의 단지 플라스틱 완구류의 판매를 위해 제작되었었던 캐릭터 만화('toyetic' cartoons)의 범람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떻든, 이 에세이는 "스머프"에 대한 굉장한 찬양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어떤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이 냉전의 시대에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주의의 논쟁을 보여주었는가? "스머프"는 은유(metaphor)와 동화라는 형식을 사용하여 어린이들에게 정치적인 주제를 소개했다는 점에서 찬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만약 Peyo가 사회주의자였다면, 그는 소련연방(the Soviet Union)과 동구의 경찰 국가권에서 실행되던 형태의 사회주의를 추종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이상주의자(utopian)였다. 따라서 스머프 마을에는 경찰도 군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한 경우에는 드물게 그들 스스로 적과 싸울 시민 의용군을 결성한다. 경찰 국가와는 명백히 대치된다. "스머프"에 나타난 마르크스주의을 짧게 분석한 후, 페미니즘과 동성애의 관점 또한 다뤄보려고 한다. 그러나 에세이의 주된 관심은 "스머프"가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한 우화라는 것이다.
2)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유토피아(Marxist Utopia)인 스머프 마을
스머프 마을은 그 자체가 사회주의자들이 꿈꾼 공동 생활체의 완벽한 전형이다. 완전히 독립적이며 토지는 개인이 아닌 전공동체의 ('소유하다'는 단어가 '사유하다'는 개념일 경우) 소유이다. 파파 스머프는 칼 막스(Karl Marx)를 나타낸다. 그는 스머프들의 지도자라기 보다는 그들과 평등한 관계로 다만 그의 나이와 지혜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 그는 칼 막스처럼 수염을 길렀다. 파파 스머프는 칼 막스의 캐리커쳐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그는 관습적으로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붉은 색 옷을 입고 있다. 똘똘이 스머프는 트로츠키(Trotsky)를 상징한다. 그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파파 스머프와 지혜를 겨룰 수 있는 인물이며, 사색가이다. 둥근 테의 안경을 쓴 그의 모습은 트로츠키의 캐리커쳐인 것이다. 똘똘이 스머프는 자신의 생각 때문에 종종 스머프 마을 공동체로부터 고립되고 조롱당하고 심지어 배척당하기도 한다. 물론 트로츠키 또한 USSR(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서 추방당했다. 스머프들은 자신들의 각기 다른 직업/특징에도 불구하고 모두는 완벽하게 평등하다. 따라서 농부 스머프, 편리 스머프, 요리사 스머프가 게으름이 스머프, 투덜이 스머프, 수선이 스머프에 비해 그 역할면에서 더욱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에 앞서 궁극적으로 그들 모두는 '스머프'이므로 직업이나 기술의 정도 때문에 더 우수하다거나 열등하다는 감정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스머프 마을은 폐쇄 시장의 성격을 띈다. 돈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소유물은 공공의 소유 즉 집단의 재산이다. 모두는 노동자이며 동시에 주인이다. 스머프는 자유 시장 경제와 그에 따르는 탐욕과 불공정을 거부하며, 집단은 개인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통일체는 그 성분들의 집합보다 더 위대하다. 존 레논(John Lennon)은 우리에게 '사유 재산이 없는 것을 상상하도록(imagine no possessions)' 요구한다. 스머프 마을은 그 목적을 달성했다. 그곳에는 하나의 자본이 생산 수단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것은 전체 집단이 소유하고 조정하며 고친다. 스머프들은 자신들의 명칭에 모두 '스머프'를 붙인다. 예를 들면, 똘똘이 스머프, 목수 스머프, 익살이 스머프, 게으름이 스머프, 파파 스머프, 이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다른 사람을 지시할 때 좀 더 선별된 호칭이 아닌 '동무(comrade)'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집단 내의 완벽한 평등이라는 개념에 더하여 대부분의 스머프들은 똑같은 종류와 색깔의 옷을 입는다. 그것은 공통적인 노동 유니폼으로 독특한 모자와 스머프들의 파란 피부색과 결합하여 공산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입는 마오 제복을 떠오르게 한다. 순수한 마르크스주의의 관습에 따라 스머프 마을은 무신론을 표방한다. 스머프 마을에는 신(神)도 사제 스머프(Priest Smurf)도 도 없다. 자연 어머니(Mother Nature)와 시간 아버지(Father Time)를 통해 은유적으로 상징되는 자연과 물리적 현상의 '실재하는' 힘만이 존재할 뿐이다. 물론 파파 스머프, 가가멜, 발타자르 등의 인물들이 실행하는 마법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종교에서 그러하듯 초현실적인 기호 속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은 아니며, 단순한 수단일 뿐이다. 시리즈 중에서 '대왕 스머프'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탐욕스런 왕들(그리고 자본가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민을 착취하는 사악하고 압제적인 정부와 마르크스가 공식화한 선하고 인류 평등주의에 입각한 정치모형 간의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충돌에 대한 예시이다. 이 이야기에서 파파 스머프가 없는 사이에 왕이 된 똘똘이 스머프를 전복시키기 위해 스머프들은 시민군을 결성하고, 파파 스머프가 돌아오자 유토피아의 질서는 회복된다. 마르크스를 나타내는 파파 스머프는 또한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적인 형태를 나타낸다. 사악한 마법사 가가멜(Gargamel)은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모든 부정적인 면을 구현하고 있다. 그는 탐욕스럽고 무자비하며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충족이다. 가가멜은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보다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이다. 또한 그는 현실적인 친구가 없는 미치고 늙은 운둔자이다. 가가멜이 스머프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는 두 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스머프를 잡아 먹는 것이다. 그러나 스머프는 작고 희귀하며 이를테면 사슴과 같이 먹기 좋은 음식이 되지는 못할 것이므로 이러한 가가멜의 욕구는 비정상적이다. 그것은 실베스타(Sylvester)가 골프공 크기의 트위티(Tweety Bird)를 잡아먹고자 하는 강박관념과 유사하다. 이것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은유적으로 가가멜이 스머프로 대변되는 사회주의를 멸망시키기를 원한다고 보는 것이다. 냉전 기간 동안 서구 사회가 소비에트 연방과 그 위성국들에게 포위 정책을 통해 사회주의의 멸망을 획책했던 것처럼 말이다. 둘째로 완전한 자본가인 가가멜은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상품으로 바꾸기를 원한다. 바로 가가멜이 스머프를 잡아서 하고자 했던 두 번째 계획 역시 그들을 황금으로 바꾸는 것이다. 궁극적인 초자본가인 그는 평등이나 선 보다는 자신의 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아담 스미스식의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가가멜에게 자신이 얻을 수 있는 만큼의 많은 돈을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가가멜은 차갑고 신랄하며 근본적으로 공허한 인간이다. 그의 삶은 부와 재산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 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실리적인 합리주의의 반사회적 효과에 대한확증적인 실례이다. 가가멜이 기르는 붉은 색 고양이 아즈라엘(Azrael)은 가가멜의 집으로 나타나는 무자비한 자유 시장 속에서의 노동자를 상징한다. 아즈라엘은 소리를 낼 수 없으므로 불평할 수가 없다. 이것은 불평할 수 없는 노동자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그는 그의 임금을 교섭할 수도 없다. 아즈라엘은 주인이 주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먹을 수밖에 없다. 가가멜보다 작고 덜 때깔이 난다는 사실은 가가멜이 부르주아인 반면 그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것은 은유한다. 아즈라엘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다. 그는 그의 주인을 위해 사냥을 하고 싸우며 목숨의 위협을 감수한다. 그러나 아즈라엘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만한 지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수세기 동안 노동자들이 교육의 기회에서 소외된 채 자신의 고용주를 위해 일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명 속에서 고통받아 왔던 것과 유사하다. 가가멜은 자신의 집과 그 안의 연금술 도구라는 자본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스머프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유한다. 가가멜의 집에 스머프들과 같은 정치적 구조가 존재한다면, 가가멜의 더 우수한 신체, 지식, 기술에도 불구하고 가가멜과 아즈라엘은 동등한 소유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즈라엘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했다. 80년대 시리즈의 후반에 새롭게 등장한 스머플링(Smurflings)과 같은 다양성을 보여주는 캐릭터는 오래된 방송 프로그램의 인기와 판매력을 증가시키려는 현실 세계의 상업적인 이해 관계의 유입으로 볼 수 있다. 80년대 중반부터 후반에 걸친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이 소련 연방의 궁극적인 종언을 예고했듯이, 방송에서 그들은 은유적으로 스머프 마을의 유토피아적인 조화를 위협하는 서구의 침입을 나타낸다.
3) 페미니즘과 스머프
모니크 위티그(Monique Wittig)에 의하면 남성은 그의 직업에 의해 그의 정체성이 규정되는 반면 여성은 '여성'으로 규정된다고 한다. 예를 들면, 사고가 발생할 경우 그 희생자 명단은 종종 "교사 한 명, 배관공 한 명, 여성 한 명" 하는 식으로 작성된다. 스머페트(Smurfette)는 스머프 마을에서 유일하게 남성 또는 진짜 스머프들처럼 직업이나 개성에 의해서가 아닌 성(性)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그녀의 성(性) 때문에 사회의 실재적인 구성원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만화 속에서 그녀가 가가멜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통해 은유적으로 드러난다.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인 접미사 'ette' 또한 스머페트가 남성들과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두 번째 성(性)인 것이다. 앞서 나는 마을의 모든 스머프들은 평등하다고 단언했었다. 어느 정도까지 이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처음에는 모두 남성 뿐이었고, 스머페트의 개입으로 가부장적인 질서가 위협받지도 않았다. 따라서 스머페트는 정치적으로는 여타의 스머프들과 평등한 관계지만, 사회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이상적인 성차별적인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공동체의 일부가 아니다. 그들은 노동과 외부 사회의 '공적인영역'에 종사하지 않으며, 물론 노동도 하지 않는다. 스머페트는 제작자가 고맙게도 그녀를 머리가 텅 빈 허튼 계집애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유일한 일은 예쁘게 보이며 주위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확실히 파파 스머프를 제외한 나머지 스머프들 보다는 다소 똑똑하다. 스머페트는 확실히 남성의 시선 속에 존재하는 '대상(object)'이다. 그녀는 대상이며, 남성들은 주체이다. 그들은 능동적이지만, 그녀는 수동적이다. 스머페트에게는 유방이 없다. 스머페트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고려할 때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녀는 가가멜의 거의 프랑켄슈타인적인 창조물로 삶을 시작했다. 자본가인 가가멜은 당연히 그녀를 만들고 사용하고 처분할 수 있으며 그에게 돈을 벌게 해줄 상품으로 취급했다. 여성이 남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생각은출산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부정한다. 스머페트에게 유방이 없다는 사실은 이러한 자연의 부정, 여성을 가부장적인 체제에 의해 부과된 사회 규범에 순응하게 만들어 그들을 제어하려는 남성들의 시도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스머페트는 남성 스머프들을 본따서 만들었다는 점에서 부차적인 창조물이다. 그녀는 돌로 된 심장을 가지고 있으며, 기술적으로 부자연스럽다. 물리적이고 은유적으로 그녀는 '진짜' 스머프가 아니다. 곧 그녀는 가부장적인 문화가 오랜 세월 동안 여성을 바라봐온 관점과 마찬가지로 사악하고 잘못된 존재이다. 어떻게 해야 보다 훌륭한 여성을 만들 수 있을까? 즉 어떻게 해야 여성을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로 만들 수 있을까? 하나는 그녀의 모든 투지를 빼앗는 것이다. 그녀를 고분고분하게 만들고 남성 지배 사회 구조가 만들어 내고 유지시키는 규칙에 따르게 만들어라. 이에 대한 하나의 가시적인 사례로 그녀가 검은 머리라면 금발로 변화시켜라. 서구 사회는 관습적으로 짙은 모발의 여성은 머리가 좋은 반면, 금발 머리의 여성은 머리는 나쁘지만 더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더 훌륭한 여성을 만들기 위한 다른 방법은 그녀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파파 스머프가 스머페트를 '진짜' 스머프로 만들기 위해 마법을 걸자, 그녀의 외모는 아름다워졌다. 그전에는 추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여성에게 적용될 때, 못생긴 것은 나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 현실적이다. 그러나 왜 하나는 아름답고 다른 것은 그렇지 못한가? 누가 그래? 그것은 가부장적 질서이다. 남성 대 여성의 비율이 99 : 1인 스머프 마을은 완전히 가부장제 사회이다. 이것은 여성은 상품이라는 사고에 더해진다. 그녀는 남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변화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준에 맞춰 아름다워졌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에 대해 고마워한다. 글로리아 스테이엄(Gloria Steinem)은 예전에 '여성은 역사상 최초의 드렉 퀸(drag queen; 여장한 게이를 일컬음)'이라고 했다. 즉 여성의 아름다움의 이상은 전부 가부장제에 의해 강요된 것이며 여성이 성(性)들 간의 구별을 위해서가 아닌 단지 '여성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거나, 남성들의 시선의 포착물, 단순한 대상인 여성에 대한 개념을 강화시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가부장제 사회에는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스머프 마을의 성비가 50 : 50이라면 어떨지 상상할 수 있는가?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가 방송에서 본 바와 같은 유토피아는 분명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이상적인 마르크스주의 국가는 성(性)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것이 평등할 때만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여성인 스머프 마을은 거의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 깊이 내재하는 성차별주의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스머프들에게 여성이 '자연스러운' 성(性)이라면 왜 그들이 모두 스머페트처럼 생겨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아름다움의 개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근거나 '금발의 귀여운' 같은 표현으로 등식화된 외연의 틀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4) 동성연애자 천국인 스머프 마을
스머프 마을은 스머페트가 오기 전에는 항상 전부 남성 뿐이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절대다수가 여전히 남성이다. 이것은 그들이 일반적인 방법(여성에 의한 출산)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며, 그들 사회에서는 '이성애(heterosexuality)'가 규범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느 사회보다도 순수한 민주주의에 가까웠다고 믿고 있는 아테네와 같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정부는 모든 사람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란 남성만을 가리킨다. 여성은 공적인 행사에 참여하도록 허 용되지 않았다. 아테네에서 동성애는 드문 것이 아니었으며 특별히 눈살을 찌푸릴 만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스머프도 스머페트와 관계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그녀가 덩치 스머프와 편리 스머프의 어린애 같은 연애 경쟁의 초점이 되기는 하지만, 마을 안 어디서도 진짜 이성애의 긴장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적인 덩치 스머프와 편리 스머프는 스머페트 보다는 서로에게 인상을 주는 것에 더 흥미를 느끼는 듯이 보인다. 스머프 마을에 오랫동안 여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스머프들은 스머페트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확실히 자연은 스머프들에게 남녀간의 접촉의 경우를 보여줬을 것이고 그들은 그것을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여성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이성애 또한 없었다. 따라서 어떻게 스머페트가 다른 스머프를 유혹할 수 있겠는가? 제작자들은 이성애가 존재하지도 않고 이성애의 매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언급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성애는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말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점에 대해서, 나는 제작자들은 제외시키기로 했다. 우리 사회에서 이성애는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그들은 아마도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덩치 스머프, 목수 스머프, 허영이 스머프가 남성동성연애자의 전형이라고 믿는다. 허영이 스머프는 영국의 시트콤인 "Are you being served?"와 같은 인습적인 연예 산업에서 보편적으로 보여지는 종류의 동성연애자이다. 반면 목수 스머프와 덩치 스머프는 "Village People"과 같은 맥락에서 극도의 인습적인 남성성으로 과장된 동성연애자의 전형이다. 게다가 덜렁이 스머프와 똘똘이 스머프는 동성연애자 커플의 전형을 보여 준다.
5) 결론
나는 Peyo가 우화적인 동화의 형식을 빌어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을 재현하고자 시도했다고믿는다. "스머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세계를 조명함으로서 뛰어난 판타지 문학으로 성공하고 있다. "스머프"가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보여주는 우화라는 증거는 매우 많다. 나는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매력은 이 유토피아적인 이상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비록 현실 세계에서 이뤄지기엔 너무 개연성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상상할 수는 있다.
written by J. Marc Schmidt (translated by Lee Duckj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