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시 고등학교시절로 다시 돌아가서 무엇이 될 것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단연 중고등학교 선생님이라고 자신있게 대답한다. 지금의 직업의 불만에서 나온 소원이 아닌 내자신의 성찰속에서 나온 소원이다. 청소년기를 질풍노도기의 시절이라고 부르는데 나의 청소년기는 폭풍노도기 정도 되는 것 같다.
학습에 대한 부담과 이성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 선생으로 대변되는 기성층에 대한 반항으로 얼룩진 청소년기에 좋은 선생을 못만난 내 인생은 참으로 불행했다고 생각한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었던 친구들이 방황할때 이들을 이해하고 미래로 이끌어 주는 사람을 못만나서 어렵게 되어 버린 친구들을 볼때마다, 선생님의 중요성을 새삼 느낀다.
이상하게 내가 선생님이 되면 잘할 것이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든다. 그건 아마도 청춘의 병을 심각하게 앓았던 나의 과거 때문에 학생들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오늘 소개할 미술그룹은 팀 롤린스와 팀 롤린스와 그의 공동체 K.O.S(Kids of Survival)이다. 지난 80년대 초부터 미국 미술계에서 그 새롭고도 의미있는 시도로 유명해진 그룹이다. 이들은 선생님과 학생이라는 위치에서 공동작업을 통해 미술작품을 만들어 나간다.
1981년, 팀 롤린스(1955~ )는 뉴욕시에서도 비교육적 환경으로 악명 높은 지역 사우스 브롱스(South Bronx)의 한 공립 고등학교에 미술교사로 부임한다. 그의 나이 26세일때이다. 그는 작가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실천을 주장하는 미술가 그룹이 메테리얼(Group Material; 작가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실천을 주장하는 그룹)’의 창립멤버 중 한사람이다.
그의 학교가 있는 사우스 브롱스 지역은 이른바 “제로지대(Ground Zero)”라 불리는 곳으로 학생의 60% 이상이 졸업하지 않고 학업을 중단하는 곳, 40% 이상의 가정이 정부로부터 극빈자 지원금을 받고 있으며, 95% 이상이 흑인과 푸에르토리칸 등 소수민족이다. 폭력, 마약, 성 매매 등 불법이 판을 치며, 극빈과 절망 등으로 인해 매일 사고가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백인인 그가 이 지역에 있는 고등학교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는 깨닫게 됐다. 그 학교에선 일반적인 공립학교의 미술교육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학교는 일종의 감옥이었다. 나는 거기서 간수 역할을 하기보다는 특별한 수업방식을 계발해 가르쳐보기로 결심했다.”라고 롤린스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미술을 통한 글 읽기(Learning to Read Through the Arts Program)' 라는 과목을 개설하고 담당하기로 했다.
수업을 진행함에 있어 그는 한 책을 선정해 그것을 학생들과 함께 읽는다. 책의 선정은 학생들의 나이, 관심, 흥미, 효과 등을 고려해 주로 롤린스가 결정한다. 물론 학생들의 의사를 많이 반영한다. 롤린스와 학생들은 함께 책을 읽으며 그 내용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진다. 토론하면서 그는 학생들에게 가장 분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종이를 나눠준 후 학생들에게 그것을 각각 그려보도록 한다. 여기서 그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그리면 학생이 기대한 효과가 나타날 수 있는지 그 방식을 도와준다. 학생들이 그림을 마치면 그린 그림을 벽에 펼쳐놓고 학생들과 함께 그것들의 선정, 배치, 구성을 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을 자신들이 읽은 책위에 그려나간다.
아이들과의 공동작업 사진
그는 인터뷰에서 "나는 미술을 가르치는 화가임을 그만 뒀다. 그 동안의 작가로서의 자세도 접어두었다. 그리고 좀 낯선 혼합적 방법을 실천해봤다. 나는 학생들과 같이 작품을 만들었다. 수업시간에, 휴식시간에, 점심시간에, 방과 후 시간에, 학교의 수위가 내쫒을 때까지 함께 그림을 그렸다.” 고 말했다.
3년 후, 그는 작업장을 학교 밖으로 옮겼다. 학생수가 너무 많아져 모두 수용할 수 없었고, 공립학교의 제한된 학교시설물 이용시간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학교 공무원의 관료적 제약과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 미술과 지식의 학습장(Art and Knowledge Workshop) 워크샵을 비영리재단으로 등록하고 버려진 건축을 개조해 주민문화센터로 만들었다.
1987년에 롤린스는 학교 미술 교사를 사퇴했다. 주로 ‘미술과 지식의 학습장(Art and Knowledge Workshop)’에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롤린스와 K.O.S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지만 그는 그의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게릴라 걸스는 제작한 포스터가 길거리에 나붙자마자 곧 유명해졌다. 유명해지자 게릴라 걸스는 얼굴에 고릴라 마스크를 쓰고 짧은 스커트와 그물망 스타킹, 하이힐 차림으로 공개석상에 나타났다. 그녀들은 고릴라 마스크를 쓰고 철저하게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름 역시 본명이 아닌 조지아 오키프, 프리다 칼로, 케테 콜비츠와 같은 이미 죽은 유명한 여성작가들의 이름을 차용한다.
그렇다면 왜 게릴라 인가? 그녀들은 게릴라 전의 공포를 이용하기를 원했다. 다음엔 누가 어디에서 당할 것인지 모르는 것이 사람들을 두렵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초창기 모임에서 한 회원이 guerrilla를 gorilla로 잘못 쓰는 바람에 그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그때부터 고릴라 마스크를 착용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곧 그녀들의 트레이트 마크가 되어버렸다.
이들이 지금까지 만들어온 포스터는 80장에 달하며 어떤 형태로든 미술계에 영향을 끼쳐왔다. 때로는 공격한 미술관으로부터 초청을 받기도 했다. 게릴라 걸스의 포스터는 유머러스 하면서도 상당히 냉소적인 문구와 이미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러한 눈에띄고 명쾌한 포스터들이 갖는 호소력이 강력하다.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발가벗어야 하나?
게릴라 걸스의 중 가장 유명한 포스터.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발가벗어야 하나’ 그 아래 쪽에는 현대미술 부분의 5% 미만만이 여성인 반면, 85%의 누드가 여성이다 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앵그르의 유명한 누드그림 오달리스크를 패러디.
게릴라 걸스는 또한 낙태권리, 중동전쟁, 노숙자, 홈리스, 강간등 미술계와는 관계없는 사회적 이슈와 문제들도 포스터를 통해 다루고 있다. 불공평하고 정당하지 못한 일이라면 언제든 게길라 걸스의 표적이 되었다.
조지부시 - 교육대통령
"많은 미국인들이 교육과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군대에 지원하고 있다. 부시가 공교육을 위한 진짜 정책을 썼다면 누가 그의 전쟁에서 싸우겠는가? " 전사자 묘지에 대학 졸업모를 씌운 그림이 그 어떤 반전 포스터보다 깊은 울림을 준다.
게릴라 걸스는 1999년부터 매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을 앞두고 성, 인종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항의행사를 기획해왔다.
차라리 상원이 헐리우드 보다 진보적이다
`차라리 상원이 헐리우드보다 진보적이다'이며 이외에 여성 상원의원은 14%, 헐리우드의 여성감독 비율은 4%에 불과하다는 문구가 들어있다. 게릴라 걸스는 "케케묵은 구식인 상원과 현대적인 할리우드는 공통 요소가 있다. 둘 다 여성과 유색인의 숫자에서 다른 사회 부문들에 크게 뒤떨어져있다는 점이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해부학적으로 올바른 오스카 상
2002년 아카데미 영화제를 앞두고 설치한 대형간판. 그 간판에는 ‘해부학적으로 올바른 오스카상- 그는 백인&남성이다. 이제까지의 수상자들처럼!’ 이라고 적혀있다. 이들이 그린 오스카상은 살찐 중년의 백인 남자가 두손으로 성기를 가리고 있다. 그외에 감독상은 한번도 여성이 수상한 적이 없다. 각본상의 94%가 남자에게 수여됐다. 연기상의 오직 3%만에 유색인종에게 수여됐다. 라고 적혀있다.
여성예술가들 석방하라!
미술관들은 여성예술가들을 어두운 창고속에 가두어 두고 있다. 미술관은 더 많은 여성예술품들을 전시하기를 요구한다.
미국여성은 남성에 비해 소득이 2/3밖에 되지 않는다. 여성예술가들은 남성예술가에 비해 1/3밖에 벌지 못한다.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여성예술가들은 어디에 있는가? 남성의 아래에 있다.
터키여성예술가들의 미래
터키인들은 주로 커피를 마시고 난후의 잔에 새겨진 찌꺼기의 모양을 보고 미래를 점치는 것을 즐겨하는데 이를 이용한 작품이 기막히다.
WHO’s assessment system was based on five indicators:
overall level of population health; 국민의 건강상태 health inequalities (or disparities) within the population; 건강의 불평등상태 overall level of health system responsiveness (a combination of patient satisfaction and how well the system acts); 의료체계가 국민에게 얼마나 만족을 주는가와 잘 작동되는가 distribution of responsiveness within the population (how well people of varying economic status find that they are served by the health system); 의료체계의 접근성. distribution of the health system’s financial burden within the population (who pays the costs) 재정부담이 많은가 국민들의 직접부담이 더 많은가 여부
지금은 많이 나아졌을까요? 노무현정부들어서 보장성이 강화되면서 상당한 순위상승을 예상해보지만...
프레시안에 좋은 글이 실렸군요. 현재 경기도에서 원어민 교사로 일하고 있는 제이슨 토마스 씨의 글입니다.
오륀지여사의 천박함보다 아이들과 교육을 생각하는 그의 놀라운 지성과 통찰력에 존경을 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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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E(Teaching English in English, 영어로만 진행하는 영어수업)"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영어 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돼 온 영어 교수-학습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요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영어 공교육 완성 실천방안" 발표로 "TEE"라는 구호가 한창 요란스럽게 한국 사회에서 이야기되고 있는데, 마치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면 영어 교육과 대한민국의 교육 문제가 모두 해결될 듯한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에 대해서 몇 가지 점을 분명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못 따라가는 아이들을 다른 곳에 숨겨 놓고 진행한 영어 수업
먼저, 짧은 일화 하나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2004년 제가 인천의 어느 중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연구 시범수업이 아주 야심있고 유능한 영어교사에 의해서 진행되었습니다. 학부모, 교사, 인천시 교육청 관계자들이 그 연구 수업을 참관했습니다. 그 수업은 영어로만 진행되어지는 수업이었고, 성공적인 수업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수업에서 배제된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언급이 없었습니다. 2명의 학생은 그 전체 수업시간을 제가 있는 사무실에서 숨어서 그 연구수업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그 연구 수업에서 배제되었습니다. 그들이 연구 수업에 참여하는데 필요로 하는 영어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학생이 꺼낸 단어는 'disaster(재해)'
그러나 그들은 제게 그 상황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있는 영어 사전을 사용해서 그들이 원하는 단어를 찾아냈습니다.
그 단어는 바로 "재해(disaster)"라는 단어였습니다. 매우 적당한 표현이었습니다. 영어를 가장 필요로 하는 그들을 고의적으로 배제하고,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구 수업. 그것이야말로 저에게는 비참한(disastrous) 재난과 같은 상황으로 느껴졌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것이 바로 TEE(Teaching English in English)입니다.
최신 이론은 교육 현장의 실정을 강조하는 것…한물 간 이론에 집착하는 인수위
TEE(영어로만 진행하는 영어수업)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 흐름을 살펴보면, 이는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며, 오래전부터 연구되어 왔고, 연구 초창기에는 목표 언어(English)를 중심에 두고, 그 목표 언어(English)만을 수업시간에 사용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TEE 이론의 방향은 학교 교실 현장의 실정에 맞게 운영하는 것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만약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나 이명박 정부가 영어를 한국 사회에서 공용어로 만들고자하는 의도라면, 미국에서 나온 영어 공용어와 관련된 최근의 여러 연구물들을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분명 그들의 의도와는 다를 것입니다.
"모국어가 외국어 수업에서 완전히 배제돼야 한다"는 주장은 잘못
저는 아직까지 모국어가 외국어 수업에서 완전히 배제되어져야한다고 믿는 언어 학습 전문가를 한 명도 본 적이 없습니다.
영어 몰입 교육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보다 더 극단적인 입장을 이명박 정부가 취하고 있어 보입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제안된 영어 교육 방안은 학교 현장의 교실 수업에서도 적절하지 않은 교수 방법이며, 좀 더 크게 봐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위해서도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당연히 영어 수업시간에 한국어가 완전히 배제되어야한다는 생각, 영어 수업시간에 오직 영어로만 진행되어야한다는 생각에 분명하게 반대합니다.
"영어 수업에서 한국어의 역할은 중요하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학급 교실에서 영어 수업시간에 한국어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학생들의 영어에 대한 중압감을 들어줄 수 있고, 영어를 배우는 중간 언어로서의 한국어는 마땅히 있어야하며, 한국어의 개입은 교사, 학생이 한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동질감도 느끼게 해줍니다.
영어 학습에 있어서의 모국어는 많은 도움을 줍니다. 외국어 수업시간이라고 한국어의 사용 금지를 강요하는 것은 학생들의 진정한 배움을 금지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TEE는 많은 오류를 가지고 있습니다. TEE는 외국어 학습자의 모국어가 제2언어 습득에 방해가 된다는 잘못된 가정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학습자의 모국어가 외국어 학습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합니다.
"미국, 영국식 영어만 표준 영어인가?"…"천만에!"
그리고 TEE는 원어민(Native Speaker)가 최고의 영어 교사라는 잘못된 가정에도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영어는 매우 다양합니다. 그러나 TEE는 미국 영어(US English)가 표준 영어라는 이상한 논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계에는 여러 가지의 영어들이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Singlish(Singapore English), Jangnlish(Japanese English), Canadian English, Irish English, Indian English, Austrailian English도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Singapore English는 영어가 아니다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Korea'라는 말 자체가 '콩글리시'다.
▲ 한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영어마을'에서 아이들이 원어민 강사에게 영어를 배우고 있다. ⓒ연합뉴스
간혹 한국 사람들은 Konglish(콩글리시)라고 하면, 그것은 잘못된 영어라고 말합니다. Korea라는 말 자체가 바로 Konglish(Korean English)입니다.
애초 영어 단어 중에 Korea라는 영어 단어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Korea는 영어 단어가 되었습니다. OXford 영어 사전을 비롯한, 모든 영어 사전에 Korea가 나옵니다.
언어란 무엇일까요? 언어의 중요한 기능은 자신들의 문화를 전달하는 매개체입니다. 그 나라의 지식, 경험, 역사, 세계관, 관습, 노래, 음식, 철학. 이 모든 것들은 언어를 통해서 만들어지고 전달되고, 재생산됩니다.
영어는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의 도움을 받아왔고, 지금 현재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완성돼 가고 있는 것이 영어입니다.
'콩글리시'는 영어를 위해서도 소중하다
영어의 주인은 없습니다. 모든 나라들이 영어의 어휘를 풍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Oxford 영어 사전에 나오는 pansori(판소리), chaebol(재벌), ondol(온돌), kimchi(김치), hanbok(한복)과 같은 콩글리시(Konglish) 표현들이 바로 Korean English입니다. 한국어가 영어의 어휘를 더 풍성하게 한 것이며, 이는 세계에 있는 여러 나라들도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만약 TEE가 교실 수업에서 유일하게 강조된다면, 한국이 가진 여러 가지 문화적 재산들은 영원히 세계 여러 나라들이 만들어가고 있은 영어의 세계에 번역되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면 TEE 수업 시간에는 한국식 영어, 즉 한국말이 배제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pansori를 영어식 설명으로 대체할 것입니다.
"한국인이 모두 영어를 구사한다면, 한국 문화는 사라질 것"
저는 Konglish가 "대한민국"의 미래는 아니라하더라도, "Korea"의 미래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 한국어가 사라진 영어 교육의 현장에서 한국의 문화는 제시될 여지가 없습니다.
만약 한국인들 모두가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한국이라는 나라의 문화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고유한 한국어가 영어라는 언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국 주도의 세계화의 맹점입니다. 그들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한국 자체의 고유한 문화를 가지든, 그렇지 않든 관심이 없습니다. 미국의 영향력 아래 들어오면 되는 것입니다. 미국이 만든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면 좋은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란, 외국어 수업시간에 중간 언어로서의 한국어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일본어인 쓰시(sushi), 가라오케(karaoke)와 같은 일본어는 이미 영어 어휘가 된지 오래입니다. 영어화된 그 단어 하나, 하나가 바로 일본 문화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배제의 원리'에 기반한 TEE, 한국의 미래 위해서도 부적절
저는 TEE의 이데올로기적인 측면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TEE는 소위 말하는 미국의 엘리트(Elite) 교육을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바로 신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 논의되어 지고 있는 것입니다.
TEE가 전면적으로 강조되어진다면, 인천의 모 중학교에서 TEE 수업 시간에 배제되었던 2명의 학생들처럼, 아니, 2명의 학생들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배제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계의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영어는 덜 풍요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문화가 영어의 세계에 배제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TEE만의 강조는 영어 교수-학습법에 있어서도 적절하지 않으며, 한국이라는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자신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키면서, 세계화되는 그 방향이 지금 이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세계화(Globalization)입니다.
Xenophobia(제노포비아)는 외국의 것(사람 포함) 또는 낯선 것을 싫어하거나 두려워하 는 것을 말합니다. 유시민씨가 번역하여 내어 놓은 "유시민과 함께 읽는 유럽문화이야 기(푸른나무, 7000원) 1, 2", "신대륙문화이야기" 동유럽문화이야기"등 일련의 시리즈 물은 영국의 한 출판사가 펴낸 Xenophobe's guid를 변역한 것으로 반드시 일독을 권하 고 싶은 책입니다.
이들 책은 영국, 프랑스 독일등 유럽과 미국, 호주 뿐만 아니라 러시아 헝가리인들의 문화, 습관등이 재미있게 쓰여 있어서 한번 책을 잡으면 좀처럼 놓기 어렵습니다. 온 갖 유머와 해학, 재치와 경이, 두려움과 조롱으로 뒤섞여 있는 이 책의 내용은 정말 로 그 나라사람들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착각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입니다. 멀리있는 낮선이가 이웃처럼 친근하게 느끼도록 하고 있죠. 바로 이 책의 목적이 거기 에 있습니다. 낯설음의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에 대한 것을 잘 알고 있는 책이라는 생 각이 듭니다.
오늘같은 설레임과 두려움이 세월이 흐른후에 재미있는 추억처럼 되고, 가끔 흩으러 져있는 마음을 다스릴때 초발심으로 기억되야할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작 우리가 두려워 하는 것은 변화 그 자체가 아니라, 변화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다.",
유마행 3시10분열차(3:10 to Yuma)는 오랜만에 보는 서부영화입니다. 우리나라는 역대로 서부영화가 크게 히트한 적이 거의 없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서부영화로 표현되는 미국정신(엄밀히 말해 미국백인정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정서적으로 공감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악명 높은 전설의 무법자 벤 웨이드(러셀 크로우)가 아리조나주에서 체포되자, 그를 유마의 교수대로 보낼 호송대가 조직되는데, 북군출신으로 현재는 소목장을 운영하고 있는 카우보이 댄 에반스(크리스챤 베일)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목숨을 건 호송 작전에 자원하고, 3시 10분 유마행 열차에 도착하기까지 그를 호송하여 열차에 벤을 태울 수 있을까?가 커다란 줄거리인 영화입니다.
어느 서부영화와 마찬가지로 어설픈 플롯이 눈에 띕니다. 자신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철도회사를 위해서 죄인을 호송하는 것도 그렇고 막판에 벤의 행동도 이해하기 힘들죠. 가정과 사나이의 의리 그리고 기독교 사상이 적절하게 거론되면서..
이 영화는 미국에선 제법 흥행한 작품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즐긴다면 나름데로 볼만한 영화. 특히 러셀 크로가 대단한 훈남으로 나온다는것...
진중권은 인터뷰에서 영어몰입정책을 발표한 새 정부 인수위를 겨냥해 "인수위원들 정신상태가 의심스럽다"며 "인수위는 시장주의 탈레반이고 시장주의 원리주의자들이다. 일종의 빈라덴 같은 사람들"이라며 극단적인 용어를 써가면서 극렬하게 비난을 하였습니다.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영어를 제일 잘하는 나라이고, 일본은 영어가 잘 안 통하는 나라다. 그러나 그 두 나라의 국가경쟁력을 비교해보라"며 영어몰입 정책으로 국가 경쟁력을 제고하겠다는 인수위 정책이 터무니 없음을 비판했습니다.
또한 "지금 학교 선생님들 전체를 2010년이라면 2년 후 아니냐? 2년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미국에 가서 어학만 배우라고 연수를 보내놓은 다음에 데리고 와도 힘들다"며 "애들 가르쳐 보지 않아서 그러신 모양인데 학생들 가르쳐 보면 한국말로 해도 수업 잘 못 따라온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인수위를 빈 라덴으로 비유한 그의 말은 적절해 보입니다. 이슬람천국을 현세에 구현하려고 원리주의에 입각해서 교리를 설파하고 테러까지도 마다 하지 않았던 '텔레반'과'빈라덴'은 아프카니스칸과 세계를 지옥으로 만들었듯이, 대한민국을 '영어천국'으로 만들기 위해서 교육테러도 마다 하지 않은 그들의 무식함과 저돌성, 그리고 그를 지원하는 막강권력은 우리나라를 '천국'으로 만들까요? '지옥'으로 만들까요?
이하는 인터뷰 전문
- 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 네. 안녕하십니까?
- 대통령직 인수위가 아주 대대적인 교육정책 수정안 지금 내놓고 있지 않습니까? 전체적으로는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 저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교육이 잘 안되는 것은 역시 지나친 경쟁논리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경쟁이라는 시장의 논리를 교육에다 무차별적으로 적용할 때 입시 위주의 교육의 폐해가 극에 달할텐데요. 시험문제 푸는 재주, 이건 학교가 학원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이거든요. 시장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경쟁력을 가진 것은 학교가 아니라 학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볼 때는 이런 시장 논리를 학교교육에다 무차별적으로 적용시키는 이런 대통령직 인수위의 방향은 결과적으로 사교육을 조장하고요 공교육의 황폐화를 낳을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벌써 강남의 전셋값이 오르고 있다고 하더군요.
- 강남의 전셋값이 오르고 있다? 그것이 대표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얘기시군요?
▶ 네.
- 최근 이 문제와 관련해 논란이 되는 것이 2010년부터 영어몰입교육을 실시한다. 그러니까 영어 외 일반과목들도 영어로 수업한다, 이런 내용인데요. 이 영어몰입교육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 한 마디로 미쳤다라고 얘기할 수 밖에 없거든요. 일단 인수위에 계신 분들의 생각이 너무 과격합니다. 시장주의 탈레반이라고 할까요, 시장주의 원리주의라고 할까요. 일종의 빈라덴 같은 사람들이거든요. 다른 수업을 전부 영어로 진행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이것만 봐도 이 분들 지금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요. 일단 불가능합니다. 왜냐 하면 제가 독일에서 5년을 살았거든요. 그리고 제가 어학을 못한다라기보다는 그래도 어감이 좀 있는 편인데 제가 돌아와서 독일어로 강의를 해 봤습니다. 우리 과에 갑자기 러시아 학생이 하나 들어와 가지고요. 그런데 굉장히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지금 학교 선생님들 전체를 2010년이라면 2년 후 아닙니까? 2년 동안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냥 2년동안 미국에 가 가지고 어학만 배우라고 이렇게 연수를 보내놓은 다음에 데리고 와도 힘들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수업의 질이 당연히 떨어질텐데 모국어로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외국어로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영역, 이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애들 가르쳐 보지 않아서 그러신 모양인데 학생들 가르쳐 보면 한국말로 해도 수업 잘 못 따라옵니다.
- 하여튼 사교육비 주범이 영어 과외다, 그래서 공교육으로 충분히 영어교육을 시켜보겠다라고 해서 나온 안인데 그래서 이 필요한 재원은 정부에서 다 대겠다. 지금 말하는 교육요원안도 포함되고 하여튼 정부가 돈을 대서 최대한 공교육에서 살아있는 영어를 시키겠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 그러니까 한심한 문제죠. 이건 간단한 산수 문제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교육이란 게 왜 하느냐. 사교육이란 건 교육의 절대적 질을 높이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상대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하는 거거든요. 우리 아이가 다른 애들보다 조금 더 나았으면 하는. 그분들 경쟁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지금 계속 경쟁 강조하는 거 아닙니까? 사교육이라는 건 입시라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건데 쉽게 말하면 영어를 아무리 못해서 남보다 잘 하면 되는 겁니다. 그냥. 사교육의 목표가 거거든요. 또 영어를 아무리 잘 해도 남과 똑같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학교에서 아무리 영어를 잘 가르치면 뭐 합니까? 경쟁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역시 사교육이거든요. 우리 애가 다른 애보다는 나아야 된다, 이거란 말이죠. 그런데 이거 이해하는데 그렇게 많은 머리가 필요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 국민들이 다 알고 인수위 그 분들만 모르는 비밀인데요. 쉽게 말하면 학교 현장에서 영어를 잘 가르친다, 그러면 사교육을 안할 것이다. 이건 뭔가 좀 방향을 완전히 잘못 잡은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게다가 또 영어로 다른 수업까지 하게 되면 수업 못 따라가는 아이들 어떻게 할 겁니까? 사교육을 받아서라도 영어 배워야 할 거 아닙니까?
- 영어 교육이 그만큼 국제사회에서 필요하다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고 볼 때 그런 영어교육의 새로운 대안이라면 그렇다면 어떤 점들로, 굳이 가야 된다면 가야 된다고 보십니까?
▶ 영어교육을 잘 시키겠다, 이건 괜찮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분들 생각이 어떤 거냐 하면 영어를 잘 해야 국가 경쟁력이 생긴다, 지금 이런 거 아닙니까? 지금. 필리핀을 보십시오. 아시아에서 영어를 제일 잘 하는 나라에 속하죠. 그리고 다른 나라 일본을 보세요. 거기 가면 영어 잘 안 통합니다. 그리고 그 두 나라의 경쟁력을 비교해 보라는 겁니다. 어느 나라가 더 경쟁력이 있는지. 그러니까 외국어라는 것은 국가 경쟁력에 물론 조금 도움이 된다고 하면, 안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외국어 문제 같은 것은 시스템으로 해결할 공학적인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가지고 옛날에 중국에서 아시안 게임할 때 택시 운전사들한테 외국 손님들 받아야 한다고 영어 못하면 면허 안 주겠다, 이랬던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운전사들이 영어 배우겠다고 난리를 쳤는데 일종의 생체 실험이죠. 그런데 우리나라 택시 딱 타 보세요. 창문 옆에 뭐가 딱 붙어 있어요. 전화만 걸면 얼마든지 통화가 됩니다. 공학적으로 해결해야할 문제거든요. 영어가 필요한 사람들, 그 사람들은 충실하게 가르치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자기 전공 더 열심히 하고, 영어 배우는 시간에. 그게 경쟁력에 더 큰 도움이 될 것이고요. 우리나라 직업 중에서 1년에 단 한 번이라도 외국 사람 만나서 외국어로 일해야 하는 상황이 있는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이 도대체 몇 퍼센트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쓸데없이 영어공부하다가 오히려 기술과 전공에서 뒤처질 수가 있습니다. 영어가 필요한 사람들은 제대로 가르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것 하는 시간에 다른 거 하는 게 낫지. 그 다음에 영어로도 얼마든지 유창하게 무식할 수 있는 겁니다.
- 그러니까 새 정부가 너무 실용주의, 성장위주로 교육정책마저 보고 있다가 지금 우를 범하고 있다, 그런 말씀이십니까?
▶ 그건 실용도 아니고요 그건 멍청한 겁니다. 한 마디로.
- 조금 다른 질문 하나 드려 보겠습니다. 최근 가수 나훈아 씨를 둘러싸고 언론보도가 나왔는데 그게 사실무근이고 루머를 재탕삼탕한 수준이다, 이런 쪽으로 여론이 또다시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언론이 너무 무책임하게 보도하고 있는 거 아니냐, 이런 비판의 목소리도 나옵니다만 최근 나훈아 씨 사건 놓고는 어떤 입장이신가요?
▶ 글쎄, 그 사건을 제가 처음부터 추적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요. 일단 언론에서 보도를 할 때는 확인이 된 다음에 보도를 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확인이 안된까 카더라, 이런 식으로 자꾸 보도를 하고요 또 그게 문제가 됐던 것 같고 언론은 요즘 대개 문제가 뭐냐 하면 대중들이 읽어야될 기사를 쓰는 게 아니라 대중들이 읽고 싶어하는 그리고 클릭을 많이 하는 그런 기사들을 쓰거든요. 그런 과정에서 확인보다는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유발하는 그런 기사들을 썼던 것. 그게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나훈아 씨도 그냥 나와서 나 괜찮다, 그냥 한 마디 하면 될 걸 계속 있다가 무슨 기자회견까지 하는 것도 좀 우습더라고요.
- 전반적으로 우리 언론을 보시면서 나름대로 미흡한 점 그리고 또 앞으로 개선됐으면 좋겠다라고 느끼는 것들은 없으십니까?
▶ 과거에는 언론을 위협하는 게 국가권력이었다면 이제 시장권력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오락적으로 흐르고 어떤 많이 읽으면 된다라는 흥미 위주로 흐르고 그러다보니까 사실을 쓰는 게 아니고 조금 전에 나훈아 씨 예가 보여주듯이 허구적인 이런것들, 거의 소설과 사실을 섞어서 기사를 쓰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거든요. 여기에 대해서 좀 경각심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vo'andare in Porta Rossa 저는 Porta Rossa로 가서 a comperar l'anello! 반지를 사려해요! Si`, si`, ci voglio andare! 그래요, 그래요, 그럴생각이에요! e se l'amassi indarno, 만약 내가 헛되히 사랑한다면, andrei sul Ponte Vecchio, 베키오 다리로 달려가서, ma per buttarmi in Arno! 아르노강에 몸을 던지겠어요! Mi struggo e mi tormento! 나는 초조하고 고통스러워요! O Dio, vorrei morir! 신이여! 차라리 죽는게 나아요! Babbo, pieta`, pieta`! 아버지, 불쌍히 여겨주세요!
누구에게나 친숙한 캐릭터였던 스머프가 탄생한지 50주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파파 스머프'와 '가가멜', '스머페트'와 '아즈라엘'등등 스머프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어린 시절 추억의 한편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1958년 벨기에 만화가 피에르 컬리포드에 의해 창조된 파란색 피부의 이 자그마한 캐릭터들은 한국에서 '개구장이 스머프'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것을 비롯해 25개 언어로 번역돼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스머프' 캐릭터의 판권을 관리하는 벨기에 IMPS 그룹은 14일 만화 속에 등장하는 '스머프 딸기 케이크'를 재현하는 것을 시작으로 스머프들의 실제 생일인 오는 10월 23일까지 다양한 50주년 기념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전에 화제가 되었던 글이 있었죠. 스머프공동체가 실은 공산주의사회를 은유한다고요.
다시한번 꺼내어 읽어 봅니다.
개구쟁이 스머프"에 나타난 사회-정치학적인 논제
읽으려면 아래 버튼을 ..
by J. Marc Schmidt
1) 서론
다음은 80년대 대부분의 시기동안 방송되었던 Peyo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관한 논설적인 분석이다.
"스머프"는 독특한 프로그램이다. 우선 이 프로그램은 만화이고 어린이들을 위해 제작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만화나 TV프로그램과는 달리 논쟁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스머프"는 몇몇 등장인물들의 모험보다는 한 사회집단과 사회 내의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작용, 사회와 외부인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나는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가 기독교에 대한 우화이듯이 "스머프"는 정치적인 우화라고 믿는다. "스머프"는 마르크스주의(Marxism)에 대한 우화이다. 그러나 나는 "스머프"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전복적인 선전물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당시의 단지 플라스틱 완구류의 판매를 위해 제작되었었던 캐릭터 만화('toyetic' cartoons)의 범람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떻든, 이 에세이는 "스머프"에 대한 굉장한 찬양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어떤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이 냉전의 시대에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주의의 논쟁을 보여주었는가? "스머프"는 은유(metaphor)와 동화라는 형식을 사용하여 어린이들에게 정치적인 주제를 소개했다는 점에서 찬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만약 Peyo가 사회주의자였다면, 그는 소련연방(the Soviet Union)과 동구의 경찰 국가권에서 실행되던 형태의 사회주의를 추종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이상주의자(utopian)였다. 따라서 스머프 마을에는 경찰도 군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한 경우에는 드물게 그들 스스로 적과 싸울 시민 의용군을 결성한다. 경찰 국가와는 명백히 대치된다. "스머프"에 나타난 마르크스주의을 짧게 분석한 후, 페미니즘과 동성애의 관점 또한 다뤄보려고 한다. 그러나 에세이의 주된 관심은 "스머프"가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한 우화라는 것이다.
2)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유토피아(Marxist Utopia)인 스머프 마을
스머프 마을은 그 자체가 사회주의자들이 꿈꾼 공동 생활체의 완벽한 전형이다. 완전히 독립적이며 토지는 개인이 아닌 전공동체의 ('소유하다'는 단어가 '사유하다'는 개념일 경우) 소유이다. 파파 스머프는 칼 막스(Karl Marx)를 나타낸다. 그는 스머프들의 지도자라기 보다는 그들과 평등한 관계로 다만 그의 나이와 지혜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 그는 칼 막스처럼 수염을 길렀다. 파파 스머프는 칼 막스의 캐리커쳐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그는 관습적으로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붉은 색 옷을 입고 있다. 똘똘이 스머프는 트로츠키(Trotsky)를 상징한다. 그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파파 스머프와 지혜를 겨룰 수 있는 인물이며, 사색가이다. 둥근 테의 안경을 쓴 그의 모습은 트로츠키의 캐리커쳐인 것이다. 똘똘이 스머프는 자신의 생각 때문에 종종 스머프 마을 공동체로부터 고립되고 조롱당하고 심지어 배척당하기도 한다. 물론 트로츠키 또한 USSR(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서 추방당했다. 스머프들은 자신들의 각기 다른 직업/특징에도 불구하고 모두는 완벽하게 평등하다. 따라서 농부 스머프, 편리 스머프, 요리사 스머프가 게으름이 스머프, 투덜이 스머프, 수선이 스머프에 비해 그 역할면에서 더욱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에 앞서 궁극적으로 그들 모두는 '스머프'이므로 직업이나 기술의 정도 때문에 더 우수하다거나 열등하다는 감정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스머프 마을은 폐쇄 시장의 성격을 띈다. 돈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소유물은 공공의 소유 즉 집단의 재산이다. 모두는 노동자이며 동시에 주인이다. 스머프는 자유 시장 경제와 그에 따르는 탐욕과 불공정을 거부하며, 집단은 개인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통일체는 그 성분들의 집합보다 더 위대하다. 존 레논(John Lennon)은 우리에게 '사유 재산이 없는 것을 상상하도록(imagine no possessions)' 요구한다. 스머프 마을은 그 목적을 달성했다. 그곳에는 하나의 자본이 생산 수단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것은 전체 집단이 소유하고 조정하며 고친다. 스머프들은 자신들의 명칭에 모두 '스머프'를 붙인다. 예를 들면, 똘똘이 스머프, 목수 스머프, 익살이 스머프, 게으름이 스머프, 파파 스머프, 이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다른 사람을 지시할 때 좀 더 선별된 호칭이 아닌 '동무(comrade)'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집단 내의 완벽한 평등이라는 개념에 더하여 대부분의 스머프들은 똑같은 종류와 색깔의 옷을 입는다. 그것은 공통적인 노동 유니폼으로 독특한 모자와 스머프들의 파란 피부색과 결합하여 공산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입는 마오 제복을 떠오르게 한다. 순수한 마르크스주의의 관습에 따라 스머프 마을은 무신론을 표방한다. 스머프 마을에는 신(神)도 사제 스머프(Priest Smurf)도 도 없다. 자연 어머니(Mother Nature)와 시간 아버지(Father Time)를 통해 은유적으로 상징되는 자연과 물리적 현상의 '실재하는' 힘만이 존재할 뿐이다. 물론 파파 스머프, 가가멜, 발타자르 등의 인물들이 실행하는 마법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종교에서 그러하듯 초현실적인 기호 속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은 아니며, 단순한 수단일 뿐이다. 시리즈 중에서 '대왕 스머프'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탐욕스런 왕들(그리고 자본가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민을 착취하는 사악하고 압제적인 정부와 마르크스가 공식화한 선하고 인류 평등주의에 입각한 정치모형 간의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충돌에 대한 예시이다. 이 이야기에서 파파 스머프가 없는 사이에 왕이 된 똘똘이 스머프를 전복시키기 위해 스머프들은 시민군을 결성하고, 파파 스머프가 돌아오자 유토피아의 질서는 회복된다. 마르크스를 나타내는 파파 스머프는 또한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적인 형태를 나타낸다. 사악한 마법사 가가멜(Gargamel)은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모든 부정적인 면을 구현하고 있다. 그는 탐욕스럽고 무자비하며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충족이다. 가가멜은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보다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이다. 또한 그는 현실적인 친구가 없는 미치고 늙은 운둔자이다. 가가멜이 스머프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는 두 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스머프를 잡아 먹는 것이다. 그러나 스머프는 작고 희귀하며 이를테면 사슴과 같이 먹기 좋은 음식이 되지는 못할 것이므로 이러한 가가멜의 욕구는 비정상적이다. 그것은 실베스타(Sylvester)가 골프공 크기의 트위티(Tweety Bird)를 잡아먹고자 하는 강박관념과 유사하다. 이것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은유적으로 가가멜이 스머프로 대변되는 사회주의를 멸망시키기를 원한다고 보는 것이다. 냉전 기간 동안 서구 사회가 소비에트 연방과 그 위성국들에게 포위 정책을 통해 사회주의의 멸망을 획책했던 것처럼 말이다. 둘째로 완전한 자본가인 가가멜은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상품으로 바꾸기를 원한다. 바로 가가멜이 스머프를 잡아서 하고자 했던 두 번째 계획 역시 그들을 황금으로 바꾸는 것이다. 궁극적인 초자본가인 그는 평등이나 선 보다는 자신의 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아담 스미스식의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가가멜에게 자신이 얻을 수 있는 만큼의 많은 돈을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가가멜은 차갑고 신랄하며 근본적으로 공허한 인간이다. 그의 삶은 부와 재산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 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실리적인 합리주의의 반사회적 효과에 대한확증적인 실례이다. 가가멜이 기르는 붉은 색 고양이 아즈라엘(Azrael)은 가가멜의 집으로 나타나는 무자비한 자유 시장 속에서의 노동자를 상징한다. 아즈라엘은 소리를 낼 수 없으므로 불평할 수가 없다. 이것은 불평할 수 없는 노동자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그는 그의 임금을 교섭할 수도 없다. 아즈라엘은 주인이 주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먹을 수밖에 없다. 가가멜보다 작고 덜 때깔이 난다는 사실은 가가멜이 부르주아인 반면 그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것은 은유한다. 아즈라엘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다. 그는 그의 주인을 위해 사냥을 하고 싸우며 목숨의 위협을 감수한다. 그러나 아즈라엘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만한 지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수세기 동안 노동자들이 교육의 기회에서 소외된 채 자신의 고용주를 위해 일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명 속에서 고통받아 왔던 것과 유사하다. 가가멜은 자신의 집과 그 안의 연금술 도구라는 자본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스머프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유한다. 가가멜의 집에 스머프들과 같은 정치적 구조가 존재한다면, 가가멜의 더 우수한 신체, 지식, 기술에도 불구하고 가가멜과 아즈라엘은 동등한 소유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즈라엘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했다. 80년대 시리즈의 후반에 새롭게 등장한 스머플링(Smurflings)과 같은 다양성을 보여주는 캐릭터는 오래된 방송 프로그램의 인기와 판매력을 증가시키려는 현실 세계의 상업적인 이해 관계의 유입으로 볼 수 있다. 80년대 중반부터 후반에 걸친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이 소련 연방의 궁극적인 종언을 예고했듯이, 방송에서 그들은 은유적으로 스머프 마을의 유토피아적인 조화를 위협하는 서구의 침입을 나타낸다.
3) 페미니즘과 스머프
모니크 위티그(Monique Wittig)에 의하면 남성은 그의 직업에 의해 그의 정체성이 규정되는 반면 여성은 '여성'으로 규정된다고 한다. 예를 들면, 사고가 발생할 경우 그 희생자 명단은 종종 "교사 한 명, 배관공 한 명, 여성 한 명" 하는 식으로 작성된다. 스머페트(Smurfette)는 스머프 마을에서 유일하게 남성 또는 진짜 스머프들처럼 직업이나 개성에 의해서가 아닌 성(性)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그녀의 성(性) 때문에 사회의 실재적인 구성원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만화 속에서 그녀가 가가멜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통해 은유적으로 드러난다.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인 접미사 'ette' 또한 스머페트가 남성들과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두 번째 성(性)인 것이다. 앞서 나는 마을의 모든 스머프들은 평등하다고 단언했었다. 어느 정도까지 이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처음에는 모두 남성 뿐이었고, 스머페트의 개입으로 가부장적인 질서가 위협받지도 않았다. 따라서 스머페트는 정치적으로는 여타의 스머프들과 평등한 관계지만, 사회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이상적인 성차별적인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공동체의 일부가 아니다. 그들은 노동과 외부 사회의 '공적인영역'에 종사하지 않으며, 물론 노동도 하지 않는다. 스머페트는 제작자가 고맙게도 그녀를 머리가 텅 빈 허튼 계집애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유일한 일은 예쁘게 보이며 주위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확실히 파파 스머프를 제외한 나머지 스머프들 보다는 다소 똑똑하다. 스머페트는 확실히 남성의 시선 속에 존재하는 '대상(object)'이다. 그녀는 대상이며, 남성들은 주체이다. 그들은 능동적이지만, 그녀는 수동적이다. 스머페트에게는 유방이 없다. 스머페트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고려할 때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녀는 가가멜의 거의 프랑켄슈타인적인 창조물로 삶을 시작했다. 자본가인 가가멜은 당연히 그녀를 만들고 사용하고 처분할 수 있으며 그에게 돈을 벌게 해줄 상품으로 취급했다. 여성이 남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생각은출산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부정한다. 스머페트에게 유방이 없다는 사실은 이러한 자연의 부정, 여성을 가부장적인 체제에 의해 부과된 사회 규범에 순응하게 만들어 그들을 제어하려는 남성들의 시도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스머페트는 남성 스머프들을 본따서 만들었다는 점에서 부차적인 창조물이다. 그녀는 돌로 된 심장을 가지고 있으며, 기술적으로 부자연스럽다. 물리적이고 은유적으로 그녀는 '진짜' 스머프가 아니다. 곧 그녀는 가부장적인 문화가 오랜 세월 동안 여성을 바라봐온 관점과 마찬가지로 사악하고 잘못된 존재이다. 어떻게 해야 보다 훌륭한 여성을 만들 수 있을까? 즉 어떻게 해야 여성을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로 만들 수 있을까? 하나는 그녀의 모든 투지를 빼앗는 것이다. 그녀를 고분고분하게 만들고 남성 지배 사회 구조가 만들어 내고 유지시키는 규칙에 따르게 만들어라. 이에 대한 하나의 가시적인 사례로 그녀가 검은 머리라면 금발로 변화시켜라. 서구 사회는 관습적으로 짙은 모발의 여성은 머리가 좋은 반면, 금발 머리의 여성은 머리는 나쁘지만 더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더 훌륭한 여성을 만들기 위한 다른 방법은 그녀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파파 스머프가 스머페트를 '진짜' 스머프로 만들기 위해 마법을 걸자, 그녀의 외모는 아름다워졌다. 그전에는 추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여성에게 적용될 때, 못생긴 것은 나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 현실적이다. 그러나 왜 하나는 아름답고 다른 것은 그렇지 못한가? 누가 그래? 그것은 가부장적 질서이다. 남성 대 여성의 비율이 99 : 1인 스머프 마을은 완전히 가부장제 사회이다. 이것은 여성은 상품이라는 사고에 더해진다. 그녀는 남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변화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준에 맞춰 아름다워졌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에 대해 고마워한다. 글로리아 스테이엄(Gloria Steinem)은 예전에 '여성은 역사상 최초의 드렉 퀸(drag queen; 여장한 게이를 일컬음)'이라고 했다. 즉 여성의 아름다움의 이상은 전부 가부장제에 의해 강요된 것이며 여성이 성(性)들 간의 구별을 위해서가 아닌 단지 '여성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거나, 남성들의 시선의 포착물, 단순한 대상인 여성에 대한 개념을 강화시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가부장제 사회에는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스머프 마을의 성비가 50 : 50이라면 어떨지 상상할 수 있는가?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가 방송에서 본 바와 같은 유토피아는 분명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이상적인 마르크스주의 국가는 성(性)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것이 평등할 때만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여성인 스머프 마을은 거의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 깊이 내재하는 성차별주의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스머프들에게 여성이 '자연스러운' 성(性)이라면 왜 그들이 모두 스머페트처럼 생겨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아름다움의 개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근거나 '금발의 귀여운' 같은 표현으로 등식화된 외연의 틀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4) 동성연애자 천국인 스머프 마을
스머프 마을은 스머페트가 오기 전에는 항상 전부 남성 뿐이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절대다수가 여전히 남성이다. 이것은 그들이 일반적인 방법(여성에 의한 출산)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며, 그들 사회에서는 '이성애(heterosexuality)'가 규범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느 사회보다도 순수한 민주주의에 가까웠다고 믿고 있는 아테네와 같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정부는 모든 사람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란 남성만을 가리킨다. 여성은 공적인 행사에 참여하도록 허 용되지 않았다. 아테네에서 동성애는 드문 것이 아니었으며 특별히 눈살을 찌푸릴 만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스머프도 스머페트와 관계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그녀가 덩치 스머프와 편리 스머프의 어린애 같은 연애 경쟁의 초점이 되기는 하지만, 마을 안 어디서도 진짜 이성애의 긴장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적인 덩치 스머프와 편리 스머프는 스머페트 보다는 서로에게 인상을 주는 것에 더 흥미를 느끼는 듯이 보인다. 스머프 마을에 오랫동안 여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스머프들은 스머페트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확실히 자연은 스머프들에게 남녀간의 접촉의 경우를 보여줬을 것이고 그들은 그것을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여성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이성애 또한 없었다. 따라서 어떻게 스머페트가 다른 스머프를 유혹할 수 있겠는가? 제작자들은 이성애가 존재하지도 않고 이성애의 매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언급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성애는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말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점에 대해서, 나는 제작자들은 제외시키기로 했다. 우리 사회에서 이성애는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그들은 아마도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덩치 스머프, 목수 스머프, 허영이 스머프가 남성동성연애자의 전형이라고 믿는다. 허영이 스머프는 영국의 시트콤인 "Are you being served?"와 같은 인습적인 연예 산업에서 보편적으로 보여지는 종류의 동성연애자이다. 반면 목수 스머프와 덩치 스머프는 "Village People"과 같은 맥락에서 극도의 인습적인 남성성으로 과장된 동성연애자의 전형이다. 게다가 덜렁이 스머프와 똘똘이 스머프는 동성연애자 커플의 전형을 보여 준다.
5) 결론
나는 Peyo가 우화적인 동화의 형식을 빌어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을 재현하고자 시도했다고믿는다. "스머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세계를 조명함으로서 뛰어난 판타지 문학으로 성공하고 있다. "스머프"가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보여주는 우화라는 증거는 매우 많다. 나는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매력은 이 유토피아적인 이상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비록 현실 세계에서 이뤄지기엔 너무 개연성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상상할 수는 있다.
written by J. Marc Schmidt (translated by Lee Duckjean)
한국컴퓨터선교회 에서 2005년말 통계청이 실시한 자료를 이용해 작성한 대한민국복음화지도 이다.
8단계의 색 구분으로 복음화율이 저조한 9%미만에서 18%미만을 빨간색으로 표시하였고 이후 노란색까지 4단계로 구분하여 붉은 계통이 강할 수록 비복음화된 지역으로 표시했다. 파란색 계통은 연두색 18%이상에서 시작하여 파란색 30%이상지역으로 구분하여 파란색이 강해질수록 복음화율이 높게 보이도록 구분했다.
전국에서 복음화율이 제일 높은 지역은 전라남도 신안군으로 35.1%이며 그 다음은 경상북도 울릉군 31.7%, 전라북도 익산시 31.4%, 군산시 31.2%, 김제시 30.3%로 뒤를 이었으며 그 외 지역에서는 과천시가 30%, 인천광역시 강화군이 30%로 전국 합계 30%을 넘는 지역이 7개지역이다. 서울특별시에서는 강서구, 강동구가 25.4%로 제일 높게 나타났으며 제일 낮은 지역은 동대문구로 18.8%이다. 전국에서 제일 낮은 지역은 경상남도 합천군으로 5.1%에 불과했다. 중국 개신교가 6.6%, 미얀마 7.3%, 말레이시아 5.2%인 것에 비하면 선교지보다 더 낮은 수치이다. 전국 시, 도별로 복음화 율이 제일높은 곳은 전라북도로 26.3%, 서울특별시 22.8%, 인천광역시 가 22.4%로 그 뒤를 이었다.
지난 10년동안 개신교가 성장한 지역은 전라남도로 1995년 20.5%에서 2005년 21.9%로 나타났다. 제일 많이 감소한 지역은 인천광역시로 1995년 25.8%에서 2005년 22.4%로 3.4%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이는 대한민국에 복음이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감소된 수치가 나타난 것이다. 이 외에 지역에서는 충청남도, 충청북도, 전라남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1.3%에 해당하는 143,628명이 감소했다. 1999년과 2005년사이에 교회가 감소한 지역은 서울지역이 유일하다. 조사된 전국통계로 복음화율이 제일 높았던 시기는 1995년도로 19.6%이다
디비디프라임에서 소개하여 처음으로 접하게된 '시규어 로스'는 아일랜드가 아닌 아이슬랜드 출신의 4인조 남성 밴드다. 이들의 음악에서 먼저 특이하게 느껴지는 점은 노래를 자국어인 아이슬란드어로 부른다는 점이다. 노래를 영어로 부르지 않고서도 세계 락계에서 성공한 예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인데, 이쯤되면 이 밴드에는 어떤 독특한 매력이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이라크 바그다드 남쪽으로 160km 떨어진 나자프(Najaf)에서 한 시아파 이슬람교도가 ‘아슈라(Ashura)’를 맞아 칼로 자신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있는 모습입니다. 시아파의 가장 중요한 종교행사중에 하나죠. 모하마드의 손자인 이맘 후세인의 죽음을 기리는 행사로 10일간 계속된다고 합니다.
머그컵등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토끼 캐릭터가 20세기초 여류작가가 창조해낸 캐릭터였다는 것을 이 영화를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 캐릭터가 바로 피터래빗입니다.
영화 '미스포터'는 피터래빗 이야기(http://www.peterrabbit.com/)로 유명하다는 영국의 동화작가 베아트릭스포터의 삶과 사랑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동화는 영국 문학계의 살아있는 신화이자, 무려 100년 동안 전 세계 1억부 이상, 30개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합니다.
'브리짓존슨의 일기'로 세계 영화계에 등장한 르네 젤위거와 훈남 이완 맥그리거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보면 재미있을 듯.
다만 영화가 너무 착해서 밋밋한 구성이 걸작이라고 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때론 이런 착하고 아름다운 영화가 우리 삶에 필요하지요.
민노당의 분당문제로 혼란스러울때 그 중심에는 조승수전의원과 홍세화씨가 있습니다. 조승수의원과 홍세화씨의 공통된 의견은 종북주의와 패권의식으로 물들어 있는 자주파들이 있는한 민주노동당에서 진보적 가치를 찾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홍세화씨는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민주노동당의 당권파인 자주파 또는 주체파는 한국적 분단현실의 산물이긴 하나, 그들이 당권을 잡고 있는 한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다. 그들은 책임 주체도, 토론 주체도, 진보의 주체도 아니다. 자신들끼리 폐쇄회로를 이루고 있으며 수적으로 우세한 당내 헤게모니 장악에만 관심이 있다. 당은 통일전선 전술의 시각에서 보고 있으며 진보는 포장이지 내실이 아니다. "
저는 조승수의원과 홍세화씨를 다르게 봅니다. 물론 둘다 대책없다는 점에서 비판적이지만 조선일보에다 '친북세력'운운하며 당내개혁의 칼날을 엉뚱하게 휘두르는 조승수에게서 진정성보다 당권에서 소외된 정치인의 입신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같은 입장과 행동을 하고 있는 홍세화에게서는 고뇌가 느껴집니다. 참으로 아리송하지요. 저도 이를 이성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감성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증거이겠지요. 실은 그가 과거에 걸었던 발자취들이 지금 구렁텅이에 빠져있는 진보세력의 구출을 위해 뛰어든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조승수와는 달리 민노당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없었다는 것도 작용했으리라 봅니다.
그는 남민전의 전사출신이지요. 남민전은 군사파쇼시절에 있었던 가장 급진적인 진보운동전선이었습니다. 김남주시인은 조직운영비마련을 위해 부자들의 담을 넘기도(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했으며 그들의 강령들은 종북주의를 넘어선 것이었지요. 그들의 노선은 후에 식민지반봉건주의로 규정한 NL노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조직의 일원이었던 그가 자주파에 대해서 냉철한 평가를 내린것에 대해서는 유념해야 할 부분입니다.
제가 분당파들에게 비판적인 것이 곧바로 소위 자주파들의 의견이 옳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마 자주파에 대해서 가장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중에 하나가 저일 것입니다. 조승수가 민주노동당내의 소위 종북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은 틀린 말이 결코 아니라고 믿습니다.
다만 분당을 전제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가 분당론을 제시하는 근거들이 당내에서 싸워서 개혁되기 어렵기때문에 이번 총선에서 활동하려면 당내투쟁보다 신속한 분당이 더 유리하다고 하는 극히 정치공학적인 접근한 것에 문제를 삼은 것입니다. 진보운동이 무슨 50미터달리기도 아니고, 국민들이 바보입니까? 깃발만 보고 얼씨구나 쫓아가게...
민주노동당이라는 브랜드는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10석이라는 의석을 대한민국 진보운동역사상 최초로 이루어낸 정당입니다. 이런 브랜드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허물어 버리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겠지요.
그런점에서 독일의 사회민주당을 주목해봅니다. 130여년이라는 세월동안 때론 극좌노선이 판을 친적이 있으며, 개량주의적 우파득이 득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진보운동 세력들은 그 당의 이름하에서 투쟁하며 당의 진로와 독일사회의 미래를 결정지어 왔습니다. 우리처럼 시대에 낡은 이념이다라며 하루아침에 당을 해체해버리고 싶은 정세가 한두번이었겠습니까?
지금 진보운동세력은 튼튼한 교두보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 점에서 민주노동당은 진보운동세력 모두에게 소중한 자산입니다.
지금 홍세화도 유시민처럼 지식인에서 현실 정치운동으로 뛰어들려 하고 있습니다. 둘다 인식은 비슷합니다. 지금의 민주당으로 안되겠다면 개혁당을 창당했던 유시민처럼 지금의 민노당은 안되겠다며 새로운 진보정당을 창당하겠다는 것이지요. 이런 그를 보고 "센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홍세화는 민노당을 가른다"라며 비아냥거리는 말이 들리기도 합니다.
저는 홍세화씨의 시도가 무가치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나름데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노동당에겐 커다란 자극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민주의 정당이 부재한 한국에서 사민주의를 내걸은 진보정당은 유의미합니다. 파시즘적이고 봉건적인 주체사상의 그늘을 극복하고, 레닌주의의 언어적(?) 급진성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사민주주의를 전면으로 내건 정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이념적 성향과 가장 일치하기도 하고요. 저는 그것이 민주노동당내에서 치열한 이념투쟁으로 얻어내야 할 것이라는데 홍세화와 다른 스탠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건약총회때 홍세화씨를 초청한 것을 두고 이의를 제기하신 분들이 있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특정정파를 두둔한 것이 아니냐라고 하는 오해가 있을수 있겠지만 건약은 민주노동당의 현재 분란에 대해서 중립적이다 못해 가치판단 자체를 유보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홍세화를 초청한 것은 그가 가장 영향력있는 진보 지식인이라는 것이고, 저널리스트로서 가장 비판적으로 현 정세를 판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민노당 분당이 이슈화되면서 이 문제에서 정말 중립적인 정파에 속하는 진보적인 지식인은 없을 것입니다. 최소한 그가 민노당에 애정을 가졌다면..
그는 한국사회에 몇 안되는 존경받을 가치가 충분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인터넷을 다니다가 보면 그가 지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읽고 진보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글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한국사회의 진보운동을 실어나르려는 택시기사로 나섰고, 택시의 특성상 그의 운전능력을 빌어서 어디로 갈지는 그 차에 탄 우리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이번 총회에서의 강연이 그의 고뇌를 이해하고 우리의 나갈길에 대해서 더 고민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유시민이 통합신당을 탈당한다는 뉴스를 보고 참으로 착찹했습니다. 저는 무슨 당이 되었든 당이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탈당하는 것을 나쁘게 보지않습니다만 별로 신뢰하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정치인의 주요 덕목은 권력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물론 마키아벨리즘처럼 권모술수가 판치는 권력지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외형화시켜내고, 동조자를 규합하여, 마침내 실행할 수 있는 힘, 즉 권력을 가져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바로 그 힘을 말하는 것 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은 나 혼자만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나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진보적 또는 보수적 가치를 공유하면서 반대도 하고 찬성도 해가면서 동지들을 규합해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차원에서 싸움닭이 되다가도 유연한 협상력을 가져야되기도 하고, 자신의 가치와 완전히 반대되는 사안의 경우 치열하게 싸워야 되고, 사안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자신의 가치를 반영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때론 얻을 것을 위하여 잃기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책임이 중요합니다. 책임감은 정치인에 대한 대중의 신뢰얻는데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자신과 가장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정당에서도 승리하지 못한 자신의 정치력을 정당 그 자체의 문제로 책임을 돌리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그런점에 유시민은 터무니 없이 부족한 정치인입니다. 그는 전형적인 선비이고 학자이지 정치인이 되기는 어려운 사람입니다. 책과 글로서 대중의 신뢰를 얻을 수 있지만, 정치행위로서 대중의 신뢰를 얻는데는 실패했습니다.
길지 않는 정치생활중에 그가 관여한 당만해도 개혁당부터 통합신당까지 질곡을 겪어 왔습니다. 그가 가는곳에 동지의 규합이 있기보다는 분열과 갈등만이 있어 왔습니다. 유시민입장에서 매우 억울할 수 있지만 대중들에 비추어지는 정치인 유시민은 갈등의 골이 었습니다. 보수적 당내세력과 싸우는데 있어서 노무현의 그것처럼 거친 언사만 있었지, 치밀한 전략도, 전략을 실행할 능력도, 그를 도와줄 동지도 없었습니다.
그는 오늘 기자회견에서 "2002년 정치를 시작하면서 보스정치, 돈 정치, 지역주의 정치를 극복하고 좋은 정당을 만들고, 좋은 정당에 모인 분들과 함께 우리 사회의 온건진보 세력을 대표하면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해 나가겠다는 두 가지를 약속했었다"고 회고하면서, "지금 대통합민주신당에는 좋은 정당을 만들겠다는 꿈을 펼칠 공간도 남아있지 않으며, 제가 꿈꾸었던 진보적 가치가 숨 쉴 공간이 너무나 좁아 보인다"고 탈당이유를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유연한 진보노선의 좋은정당"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이제 유시민이 당만들기 노름을 그만했으면 합니다. 그가 대구에서 출마한다는 것도 위선적으로 보입니다. 마치 시험 못보아서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이 드런난 수험생이 이왕이면 서울대보다가 떨어졌다는 말 듣고 싶어서 서울대에 원서를 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자신이 무슨 큰 희생을 치루는양하는 모양새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현재 지역구인 일산에서 나오면 백발백중 낙방이겠지요.
유시민에게 매우 가혹한 평가를 내렸지만 아직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정치인이자 지식인입니다. 지식인이 정치에 뛰어 들었을때 이러면 안된다는 반면교사로 보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이제 은퇴하고 다시 지식인으로 돌아 왔으면 합니다.
그가 정치에 뛰어들면서 "스포츠경기가 열리는데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반칙을 저지르고 심판을 매수하여 심판이 그의 편을 들때 앉아있는 관중이나 해설가가 되기보다 경기에 뛰어들어서 부당함을 고쳐나가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뛰어 들었던 경기장은 더 엉망이 되었으며, 심판의 엉뚱한 판정에 야유를 보내는 쾌감마져 관중들에게 박탈하였고, 이제 경기는 반칙이 합법이 되어 버려습니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깨닫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 아래는 지난 2006년 1월초 유시민이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을때 썼던 글입니다.
오늘 청와대에서 유시민의원을 열린우리당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보건복지부장관으로 임명했다고 합니다. 어짜피 내년정도면 열린우리당과 청와대는 각각 딴길을 가겠지만 유시민의원의 복지부장관 임명으로 그것이 빠르게 앞당겨지지 않을까하고 예상해봅니다.
유시민의원은 제가 무척 좋아했던 지식인이자 정치인입니다. 그가 지었던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지금의 중고등학생들도 널리 읽히는 책이고, 80년대 운동했던 분들이라면 서울대프락치사건에서 그의 항소이유서에서의 가슴뭉클한 감동을 느껴보셨을 겁니다.
저의 책장에도 그가 지은 책들이 많이 있는데 '경제학까페'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유시민과 함께읽는 유럽문화이야기' '신대륙이야기' '동유럽이야기' Why not'등 그가 지은 거의 모든 책을 가지고 있을 정도입니다.
책뿐만아니라 그의 말과 글들속에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제 인생에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97년 유행했던 김대중불가론과 개혁신당때에는 그 누구보다 열혈한 지지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가 100분토론 사회를 보다가 정치권에 입문하면서 말했던 일성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심판자의 위치에서 호각을 불고만 있기에는 정치라는 경기장은 온갖 반칙과 부정이 판치고 있어 직접 경기에 뛰어들고 싶었다' 유시민의 매력이라면 그런 패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복지부장관으로 임명된다는 소식은 그리 썩 반갑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가 그간에 보여주었던 정치적 행보에서 보여주었던 노무현에 대한 일방적지지로 인해 그가 그의 지지자들에게 안겼던 실망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행보를 보면 그가 한때 전두환을 옹호하던 장세동을 비판하면서 했던 야꾸자문화와 조폭문화를 그대로 답습하는 듯한 행보를 보입니다.
그가 복지위원으로 있으면서 뚜렸한 업적도 없는 것도 그가 복지부장관을 하는 것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게합니다. 물론 그도 억울할 수 있습니다. 온갖 정치적 발언에대해서만 보도가 되고 그의 의정활동은 보도되지 않았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거나 왜곡되었다고 억울해 할 수 있습니다.
여당내에서 유시민은 김두관, 이강철과 함께 영남 3인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호남정치세력이 다수인 민주당이나 열린우리당으로는 민주세력을 결집할 수 없다는 정세판단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것이 노무현대통령의 대연정이라는 기도 안차는 제안으로 지역구도를 해체해야 겠다는 구상이 나온 것입니다. (실은 대연정에 저도 완전히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실은 10여년전의 김대중불가론의 연장선상에 있는 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정치를 하는 것은 정치인의 흉이 아니라 덕입니다. 그런데 그의 현재적 모습에서 정치적 신념에서는 그릇된 오기 비슷한것을 느끼게 합니다.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행동으로 반대자들을 포섭하거나 포위해내는 것은 정치인의 능력의 징표입니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 능력을 언어적 궤변이나 과잉된 말의 진원지처럼 느껴집니다. 한마디로 주둥이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강준만같은 이는 그의 정치를 빼기의(마이너스의) 정치라고 폄하하기도 합니다.
그가 복지부장관이 되는 것은 어쩔수없는 일이지만 그가 올바르게 장관직을 수행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국민 모두의 몫으로 남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