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 버거슨. 그의 책(맥시멈 코리아, 발칙한 한국학)을 읽어본 사람들은 그가 내공이 대단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것이다. 이방인 눈으로본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시선이 남다르다기 때문이다. 우리조차 관심에서 먼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슬람교도, 동성애자등등.. 미국 진보의 상징 UC버클리를 나오신 분답게..
사이언스 타임즈 에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군요, "'미래예측' 맞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라는 기사인데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최근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가 당시는 세상을 뒤흔들 만큼 떠들썩했지만 빗나간 예측 5가지를 소개해 화제가 되고 있다고 전했는데요.
첫째 지구 냉각화. 지금은 '불편한 진실'이라는과 30년 전만 해도 빙하기의 도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미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1975년 ‘차가워지는 지구(The Cooling World)’라는 커버스토리를 실었는데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지구의 기온이 꾸준히 떨어지자 기상학자들은 “농업 생산량이 줄고 세계적인 기근이 찾아올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합니다. 당시 과학자들은 자동차의 배기가스로 지구 표면에 도달하는 햇볕의 양이 줄어들기 때문에 온실가스가 햇빛을 차단, 결국 냉각화를 일으키는 주범이라고 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진행되었습니다.
두 번째 빗나간 예언은 원자력 시대의 도래. 1950년대 핵 과학자들은 화석 연료가 사라지고, 원자력 발전을 이용해 값싼 전기를 마음껏 쓸 원자력 시대가 올 거라 예측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원자력이 천덕꾸러기 신세죠.
세 번째는 인구폭발. 18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는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고,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는다"는 말을 한적이 있죠. 노벨상 수상자인 파울 엘리히는 68년 '인구폭탄'이라는 책을 통해 "70~80년대 수천만 명이 기아로 사망 하는 대재앙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합니다. 2차대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베이비붐’이 그런 공포를 불지른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지금 전 세계 인구는 당시의 두 배인 65억 명이지만 출산율은 오히려 떨어져 고민 중이고 유엔은 세계 인구가 2300년에는 90억 명 선에서 안정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네번째 예언은 '팍스 자포니카' '태평양 시대' 등으로 불리며 일본이 미국을 대신해 세계 초강대국으로 부상한다는 것.
일본은 1990년대에 ‘잃어버린 10년’을 회복하느라 지금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고 그저그런 강대국에 불과하죠.
다섯 번째는 제2의 9·11테러 가 일어난다는 것.
내일이라도 당장 테러일어난다고 난리를 쳤던 뉴라이트들은 서서히 자리에서 물러나고 있는중.
노스트라다무스가 1999년 인류가 멸망한다는 유명한 예언들이 많이 있었죠. 이들의 예언이 대부분 주술적이거나 근거가 희박한 것이었는데 위의 5가지 예언은 과학적 근거나 통계학적 근거에 기반한 근거였던 것이 특징입니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이다라는 것도 깊이 세겨들을 필요는 없을 듯. 다만 참고만 할뿐.
올해 대한민국사람들이 가장 많이 예측하고 싶은 것은 대선결과일텐데.. 승리의 주인공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여도 축구에서 공이 둥글듯... 정치는 생물이라...
디비디와 인터넷이 발달한 작금의 현실은 시네필에게는 천국입니다. 90년대초 문화학교서울등 소규모 시네마테크등에서 구린 비디오화면과 조잡한 스크립터로 보던 영화들을 뛰어난 화질로 안방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신이 우리에게 내린 축복이라고 밖에 말할수 없습니다.
그나마도 보고싶어도 보지 못하던 영화들이 수두룩했지요. 영화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수많은 영화들이 텍스트에서만 존재하지 실재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했지요. 이젠 르미에르, 그리피스,에이젠쉬타인, 트뤼포등 원하는 영화면 언제 어디서든지 구해서 볼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10년전만해도 거실에 채플린전집과 큐브릭의 전집이 버젓이 자리잡고 있을 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매주토요일 가족이랑 프로젝트로 옛 영화를 보는 재미가 기막힙니다. 특히 어릴때 명화극장에서 보았던 영화를 다시보는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지붕위의 바이올린' '사랑은 비를타고''오즈의 마법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등등. 세대를 뛰어넘는 걸작들이죠. 요즘은 '키즈' '써커스'등 채플린을 다시보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제가 찾아 헤메던 영화가 바로 시드니 루멧의 '12명의 성난 사람들'들입니다. 중학교 시절 고정영일씨의 해설로 시작된 어렴픗한 기억속에 영화입니다.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법정드라마입니다. 즉 여기에서 말하는 12명은 미국법정의 배심원 숫자입니다. 빈민가 출신의 미천한 소년이 자신을 폭행해왔던 양아버지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구속되고, 확실할 것은 증거도 있고 목격자도 있고 변호사도 그의 무죄변호를 포기한 누구나 그의 유죄를 의심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외롭게 의문을 품었던 단 한사람의 설득으로 상황이 반전되어 간다는 내용입니다.
이 영화는 1957년작으로 흑백의 단조로운 화면과 편집기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카메라가 배심원실을 떠난 적도 없고, 판사도 피고인도 등장하지 않으면서 오직 대사로만 영화의 긴장도를 유지합니다. 관객들로 하여금 지루할틈도 주지 않고 영화는 질주해 나갑니다. 대단하죠.
이 영화속의 12명의 인간군상들의 모습은 나의 모습이기도 하도, 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사물과 사건을 쉽게 예단하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 말입니다. 군중심리, 계급적 차별의식, 중산층의 나태한 사고, 어릴적 아버지와의 갈등때문에 오디푸스컴플렉스의 늪에 빠져 교통을 겪는 남성들이 나타납니다.
무엇보다도 민주주의를 생각하게 합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아니라 토론과 논쟁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편견에 사로잡혀 빨리 결론을 내리려는 사람, 특정지역, 특정인종에 대한 편견으로 사람의 모양새를 단정하는 사람, 논증보다는 목소리 큰것으로 제압하려는 사람,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다수의견에 묻어가려는 사람, 논쟁상대에 대한 편견으로 상대의 말이라면 무조건 힐난으로 일관하고 반대하는 사람, 소수의견에 용기를 주려고 격려하는 사람, 합리적이지만 논쟁에 끼어들지 않으려는 사람등등 이 영화속의 배심원들을 보면 각자의 모습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조금씩 보게됩니다.
만들어진지 정확히 50년전의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지금도 강렬한 힘을 발휘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보시면 엄지손가락 두개를 치켜 세울 것입니다. 신의 축복으로 디비디로 출시되어 있습니다.
베토벤이 휘갈겨쓴 악보를 깨끗하게 정리하는 작곡가를 꿈꾸는 여자필사와 말년의 베토벤과의 우정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100% 픽션입니다.
9번 교향곡이 울려퍼질때 전신에 울려대는 감동은 어마어마 합니다. 또한 영화전편에 흐르는 베토벤의 음악도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다만 엉성한 플롯과 사실관계의 취약함때문에 감상을 방해합니다. 베토벤은 9번을 작곡할때에는 전혀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베토벤과 여성필사간의 사랑과 갈등을 그리기 위해 어떻게 보면 정상인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때에 따라선 귀가 안들리는 것으로 설정되었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