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내가 중학교 3학년일때 일이다. 그때만해도 중학생이 영화를 본다는 것이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영화관에는 뒷자리에 "임검석"이라는 것이 있어서 경찰이나 학생주임선생등이 수시로 몰래 영화를 보러온 학생들을 색출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중학교때 나는 덩치도 조그만하고 나이보다 옛되보여 초등학생으로 오인 받기 쉬웠다. 거기에대가 지금도 그렇지만 소심하기 그지 없었던 같다. 그런데 유난히 영화를 보는데에는 용감했다. 초등학교 졸업식때 선물로 받은 돈을 가지고(금액은 기억이 안남) 성인 영화를 보러 간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임검석 : 1922년 일제시대 영화에 대한 검열이 시작된 이래 극장에는 임검석이라는 검열석이 극장 한편에 자리잡게 되었다. 당시에는 극장에서 영화상영 뿐만 아니라, 연극, 악극단, 창극단 공연이 수시로 있었는데,조선총독부 산하 부서기관에서 상영이나 공연이 있을때마다 경찰을 파견하여 내용이나 주제를 현장에서 검열하였다. 유신때에는 극장내 풍기문란이나 소란, 미성년자 관람행위를 검열하는 경찰등이 앉아 있었다.
80년은 전두환이 정권을 강탈한 후 광주에서 학살이 있었던 시절이다. 하지만 중학생인 우리들은 그런 세상과 동떨어져 지냈는데, 오로지 이성에 대한 관심과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만이 우리들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을 단체관람을 갔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단체관람은 학생들로 하여금 싼가격에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이고, 공부를 땡땡이 칠수 있다는 점에서 환상적인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영화의 제목도 그렇고 포스터나 극장간판을 본후 너무나 재미없게 보여 친구들 몇몇이 작당을 하여 50여미터 떨어진곳에 위치한 소위 3류극장에서 본 영화가 바로 "색깔있는 여자"이다. 지금 기준으로 15세이상도 받기 어려운 영화지만 당시에는 여배우의 속살이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미성년자관람불가'이던 시절이다.
장미희의 뒷모습만 살짝 나오는 목욕장면과 키스신, 정사신(거의 노출이 안됨)에서의 신음소리.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뇌를 가득채운 어린 우리들에겐 너무나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고등학교 선생님이 임검석에 있을 줄이야! 줄줄이 영화를 보는 중에 끌려 나왔고, 학교이름과 학년을 적어 갔다. 그리고 당연히 꿀밤 한대씩!
다음날 담임이 우리들을 부르는데 한마디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색깔나와!
그날 무진장 맞았다. 다행히 정학을 당할 사안이었는데 불행중 다행으로 몸으로만 때울 수 있었다.ㅋㅋ
1981년 6월 27일개봉
"性 그 진실이 타오른다. 그녀의 전부를 보여줍니다." 라는 강력한 유혹에 견딜 청춘이 있을까?
"외설이냐? 예술이냐 ?"라는 카피는 오래된 성인영화 광고문구인데, 이 영화는 "....? 예술이냐? 이제 당신들이 이영화를 심판할 차례다!"라고 적혀 있군요. 군사정권 초창기 엄혹한 시절이었으니...
유마행 3시10분열차(3:10 to Yuma)는 오랜만에 보는 서부영화입니다. 우리나라는 역대로 서부영화가 크게 히트한 적이 거의 없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서부영화로 표현되는 미국정신(엄밀히 말해 미국백인정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정서적으로 공감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악명 높은 전설의 무법자 벤 웨이드(러셀 크로우)가 아리조나주에서 체포되자, 그를 유마의 교수대로 보낼 호송대가 조직되는데, 북군출신으로 현재는 소목장을 운영하고 있는 카우보이 댄 에반스(크리스챤 베일)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목숨을 건 호송 작전에 자원하고, 3시 10분 유마행 열차에 도착하기까지 그를 호송하여 열차에 벤을 태울 수 있을까?가 커다란 줄거리인 영화입니다.
어느 서부영화와 마찬가지로 어설픈 플롯이 눈에 띕니다. 자신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철도회사를 위해서 죄인을 호송하는 것도 그렇고 막판에 벤의 행동도 이해하기 힘들죠. 가정과 사나이의 의리 그리고 기독교 사상이 적절하게 거론되면서..
이 영화는 미국에선 제법 흥행한 작품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즐긴다면 나름데로 볼만한 영화. 특히 러셀 크로가 대단한 훈남으로 나온다는것...
누구에게나 친숙한 캐릭터였던 스머프가 탄생한지 50주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파파 스머프'와 '가가멜', '스머페트'와 '아즈라엘'등등 스머프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어린 시절 추억의 한편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1958년 벨기에 만화가 피에르 컬리포드에 의해 창조된 파란색 피부의 이 자그마한 캐릭터들은 한국에서 '개구장이 스머프'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것을 비롯해 25개 언어로 번역돼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스머프' 캐릭터의 판권을 관리하는 벨기에 IMPS 그룹은 14일 만화 속에 등장하는 '스머프 딸기 케이크'를 재현하는 것을 시작으로 스머프들의 실제 생일인 오는 10월 23일까지 다양한 50주년 기념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전에 화제가 되었던 글이 있었죠. 스머프공동체가 실은 공산주의사회를 은유한다고요.
다시한번 꺼내어 읽어 봅니다.
개구쟁이 스머프"에 나타난 사회-정치학적인 논제
읽으려면 아래 버튼을 ..
by J. Marc Schmidt
1) 서론
다음은 80년대 대부분의 시기동안 방송되었던 Peyo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관한 논설적인 분석이다.
"스머프"는 독특한 프로그램이다. 우선 이 프로그램은 만화이고 어린이들을 위해 제작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만화나 TV프로그램과는 달리 논쟁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스머프"는 몇몇 등장인물들의 모험보다는 한 사회집단과 사회 내의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작용, 사회와 외부인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나는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가 기독교에 대한 우화이듯이 "스머프"는 정치적인 우화라고 믿는다. "스머프"는 마르크스주의(Marxism)에 대한 우화이다. 그러나 나는 "스머프"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전복적인 선전물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당시의 단지 플라스틱 완구류의 판매를 위해 제작되었었던 캐릭터 만화('toyetic' cartoons)의 범람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떻든, 이 에세이는 "스머프"에 대한 굉장한 찬양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어떤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이 냉전의 시대에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주의의 논쟁을 보여주었는가? "스머프"는 은유(metaphor)와 동화라는 형식을 사용하여 어린이들에게 정치적인 주제를 소개했다는 점에서 찬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만약 Peyo가 사회주의자였다면, 그는 소련연방(the Soviet Union)과 동구의 경찰 국가권에서 실행되던 형태의 사회주의를 추종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이상주의자(utopian)였다. 따라서 스머프 마을에는 경찰도 군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한 경우에는 드물게 그들 스스로 적과 싸울 시민 의용군을 결성한다. 경찰 국가와는 명백히 대치된다. "스머프"에 나타난 마르크스주의을 짧게 분석한 후, 페미니즘과 동성애의 관점 또한 다뤄보려고 한다. 그러나 에세이의 주된 관심은 "스머프"가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한 우화라는 것이다.
2)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유토피아(Marxist Utopia)인 스머프 마을
스머프 마을은 그 자체가 사회주의자들이 꿈꾼 공동 생활체의 완벽한 전형이다. 완전히 독립적이며 토지는 개인이 아닌 전공동체의 ('소유하다'는 단어가 '사유하다'는 개념일 경우) 소유이다. 파파 스머프는 칼 막스(Karl Marx)를 나타낸다. 그는 스머프들의 지도자라기 보다는 그들과 평등한 관계로 다만 그의 나이와 지혜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 그는 칼 막스처럼 수염을 길렀다. 파파 스머프는 칼 막스의 캐리커쳐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그는 관습적으로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붉은 색 옷을 입고 있다. 똘똘이 스머프는 트로츠키(Trotsky)를 상징한다. 그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파파 스머프와 지혜를 겨룰 수 있는 인물이며, 사색가이다. 둥근 테의 안경을 쓴 그의 모습은 트로츠키의 캐리커쳐인 것이다. 똘똘이 스머프는 자신의 생각 때문에 종종 스머프 마을 공동체로부터 고립되고 조롱당하고 심지어 배척당하기도 한다. 물론 트로츠키 또한 USSR(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서 추방당했다. 스머프들은 자신들의 각기 다른 직업/특징에도 불구하고 모두는 완벽하게 평등하다. 따라서 농부 스머프, 편리 스머프, 요리사 스머프가 게으름이 스머프, 투덜이 스머프, 수선이 스머프에 비해 그 역할면에서 더욱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에 앞서 궁극적으로 그들 모두는 '스머프'이므로 직업이나 기술의 정도 때문에 더 우수하다거나 열등하다는 감정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스머프 마을은 폐쇄 시장의 성격을 띈다. 돈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소유물은 공공의 소유 즉 집단의 재산이다. 모두는 노동자이며 동시에 주인이다. 스머프는 자유 시장 경제와 그에 따르는 탐욕과 불공정을 거부하며, 집단은 개인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통일체는 그 성분들의 집합보다 더 위대하다. 존 레논(John Lennon)은 우리에게 '사유 재산이 없는 것을 상상하도록(imagine no possessions)' 요구한다. 스머프 마을은 그 목적을 달성했다. 그곳에는 하나의 자본이 생산 수단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것은 전체 집단이 소유하고 조정하며 고친다. 스머프들은 자신들의 명칭에 모두 '스머프'를 붙인다. 예를 들면, 똘똘이 스머프, 목수 스머프, 익살이 스머프, 게으름이 스머프, 파파 스머프, 이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다른 사람을 지시할 때 좀 더 선별된 호칭이 아닌 '동무(comrade)'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집단 내의 완벽한 평등이라는 개념에 더하여 대부분의 스머프들은 똑같은 종류와 색깔의 옷을 입는다. 그것은 공통적인 노동 유니폼으로 독특한 모자와 스머프들의 파란 피부색과 결합하여 공산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입는 마오 제복을 떠오르게 한다. 순수한 마르크스주의의 관습에 따라 스머프 마을은 무신론을 표방한다. 스머프 마을에는 신(神)도 사제 스머프(Priest Smurf)도 도 없다. 자연 어머니(Mother Nature)와 시간 아버지(Father Time)를 통해 은유적으로 상징되는 자연과 물리적 현상의 '실재하는' 힘만이 존재할 뿐이다. 물론 파파 스머프, 가가멜, 발타자르 등의 인물들이 실행하는 마법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종교에서 그러하듯 초현실적인 기호 속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은 아니며, 단순한 수단일 뿐이다. 시리즈 중에서 '대왕 스머프'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탐욕스런 왕들(그리고 자본가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민을 착취하는 사악하고 압제적인 정부와 마르크스가 공식화한 선하고 인류 평등주의에 입각한 정치모형 간의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충돌에 대한 예시이다. 이 이야기에서 파파 스머프가 없는 사이에 왕이 된 똘똘이 스머프를 전복시키기 위해 스머프들은 시민군을 결성하고, 파파 스머프가 돌아오자 유토피아의 질서는 회복된다. 마르크스를 나타내는 파파 스머프는 또한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적인 형태를 나타낸다. 사악한 마법사 가가멜(Gargamel)은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모든 부정적인 면을 구현하고 있다. 그는 탐욕스럽고 무자비하며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충족이다. 가가멜은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보다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이다. 또한 그는 현실적인 친구가 없는 미치고 늙은 운둔자이다. 가가멜이 스머프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는 두 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스머프를 잡아 먹는 것이다. 그러나 스머프는 작고 희귀하며 이를테면 사슴과 같이 먹기 좋은 음식이 되지는 못할 것이므로 이러한 가가멜의 욕구는 비정상적이다. 그것은 실베스타(Sylvester)가 골프공 크기의 트위티(Tweety Bird)를 잡아먹고자 하는 강박관념과 유사하다. 이것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은유적으로 가가멜이 스머프로 대변되는 사회주의를 멸망시키기를 원한다고 보는 것이다. 냉전 기간 동안 서구 사회가 소비에트 연방과 그 위성국들에게 포위 정책을 통해 사회주의의 멸망을 획책했던 것처럼 말이다. 둘째로 완전한 자본가인 가가멜은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상품으로 바꾸기를 원한다. 바로 가가멜이 스머프를 잡아서 하고자 했던 두 번째 계획 역시 그들을 황금으로 바꾸는 것이다. 궁극적인 초자본가인 그는 평등이나 선 보다는 자신의 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아담 스미스식의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가가멜에게 자신이 얻을 수 있는 만큼의 많은 돈을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가가멜은 차갑고 신랄하며 근본적으로 공허한 인간이다. 그의 삶은 부와 재산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 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실리적인 합리주의의 반사회적 효과에 대한확증적인 실례이다. 가가멜이 기르는 붉은 색 고양이 아즈라엘(Azrael)은 가가멜의 집으로 나타나는 무자비한 자유 시장 속에서의 노동자를 상징한다. 아즈라엘은 소리를 낼 수 없으므로 불평할 수가 없다. 이것은 불평할 수 없는 노동자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그는 그의 임금을 교섭할 수도 없다. 아즈라엘은 주인이 주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먹을 수밖에 없다. 가가멜보다 작고 덜 때깔이 난다는 사실은 가가멜이 부르주아인 반면 그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것은 은유한다. 아즈라엘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다. 그는 그의 주인을 위해 사냥을 하고 싸우며 목숨의 위협을 감수한다. 그러나 아즈라엘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만한 지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수세기 동안 노동자들이 교육의 기회에서 소외된 채 자신의 고용주를 위해 일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명 속에서 고통받아 왔던 것과 유사하다. 가가멜은 자신의 집과 그 안의 연금술 도구라는 자본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스머프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유한다. 가가멜의 집에 스머프들과 같은 정치적 구조가 존재한다면, 가가멜의 더 우수한 신체, 지식, 기술에도 불구하고 가가멜과 아즈라엘은 동등한 소유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즈라엘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했다. 80년대 시리즈의 후반에 새롭게 등장한 스머플링(Smurflings)과 같은 다양성을 보여주는 캐릭터는 오래된 방송 프로그램의 인기와 판매력을 증가시키려는 현실 세계의 상업적인 이해 관계의 유입으로 볼 수 있다. 80년대 중반부터 후반에 걸친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이 소련 연방의 궁극적인 종언을 예고했듯이, 방송에서 그들은 은유적으로 스머프 마을의 유토피아적인 조화를 위협하는 서구의 침입을 나타낸다.
3) 페미니즘과 스머프
모니크 위티그(Monique Wittig)에 의하면 남성은 그의 직업에 의해 그의 정체성이 규정되는 반면 여성은 '여성'으로 규정된다고 한다. 예를 들면, 사고가 발생할 경우 그 희생자 명단은 종종 "교사 한 명, 배관공 한 명, 여성 한 명" 하는 식으로 작성된다. 스머페트(Smurfette)는 스머프 마을에서 유일하게 남성 또는 진짜 스머프들처럼 직업이나 개성에 의해서가 아닌 성(性)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그녀의 성(性) 때문에 사회의 실재적인 구성원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만화 속에서 그녀가 가가멜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통해 은유적으로 드러난다.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인 접미사 'ette' 또한 스머페트가 남성들과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두 번째 성(性)인 것이다. 앞서 나는 마을의 모든 스머프들은 평등하다고 단언했었다. 어느 정도까지 이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처음에는 모두 남성 뿐이었고, 스머페트의 개입으로 가부장적인 질서가 위협받지도 않았다. 따라서 스머페트는 정치적으로는 여타의 스머프들과 평등한 관계지만, 사회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이상적인 성차별적인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공동체의 일부가 아니다. 그들은 노동과 외부 사회의 '공적인영역'에 종사하지 않으며, 물론 노동도 하지 않는다. 스머페트는 제작자가 고맙게도 그녀를 머리가 텅 빈 허튼 계집애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유일한 일은 예쁘게 보이며 주위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확실히 파파 스머프를 제외한 나머지 스머프들 보다는 다소 똑똑하다. 스머페트는 확실히 남성의 시선 속에 존재하는 '대상(object)'이다. 그녀는 대상이며, 남성들은 주체이다. 그들은 능동적이지만, 그녀는 수동적이다. 스머페트에게는 유방이 없다. 스머페트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고려할 때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녀는 가가멜의 거의 프랑켄슈타인적인 창조물로 삶을 시작했다. 자본가인 가가멜은 당연히 그녀를 만들고 사용하고 처분할 수 있으며 그에게 돈을 벌게 해줄 상품으로 취급했다. 여성이 남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생각은출산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부정한다. 스머페트에게 유방이 없다는 사실은 이러한 자연의 부정, 여성을 가부장적인 체제에 의해 부과된 사회 규범에 순응하게 만들어 그들을 제어하려는 남성들의 시도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스머페트는 남성 스머프들을 본따서 만들었다는 점에서 부차적인 창조물이다. 그녀는 돌로 된 심장을 가지고 있으며, 기술적으로 부자연스럽다. 물리적이고 은유적으로 그녀는 '진짜' 스머프가 아니다. 곧 그녀는 가부장적인 문화가 오랜 세월 동안 여성을 바라봐온 관점과 마찬가지로 사악하고 잘못된 존재이다. 어떻게 해야 보다 훌륭한 여성을 만들 수 있을까? 즉 어떻게 해야 여성을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로 만들 수 있을까? 하나는 그녀의 모든 투지를 빼앗는 것이다. 그녀를 고분고분하게 만들고 남성 지배 사회 구조가 만들어 내고 유지시키는 규칙에 따르게 만들어라. 이에 대한 하나의 가시적인 사례로 그녀가 검은 머리라면 금발로 변화시켜라. 서구 사회는 관습적으로 짙은 모발의 여성은 머리가 좋은 반면, 금발 머리의 여성은 머리는 나쁘지만 더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더 훌륭한 여성을 만들기 위한 다른 방법은 그녀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파파 스머프가 스머페트를 '진짜' 스머프로 만들기 위해 마법을 걸자, 그녀의 외모는 아름다워졌다. 그전에는 추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여성에게 적용될 때, 못생긴 것은 나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 현실적이다. 그러나 왜 하나는 아름답고 다른 것은 그렇지 못한가? 누가 그래? 그것은 가부장적 질서이다. 남성 대 여성의 비율이 99 : 1인 스머프 마을은 완전히 가부장제 사회이다. 이것은 여성은 상품이라는 사고에 더해진다. 그녀는 남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변화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준에 맞춰 아름다워졌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에 대해 고마워한다. 글로리아 스테이엄(Gloria Steinem)은 예전에 '여성은 역사상 최초의 드렉 퀸(drag queen; 여장한 게이를 일컬음)'이라고 했다. 즉 여성의 아름다움의 이상은 전부 가부장제에 의해 강요된 것이며 여성이 성(性)들 간의 구별을 위해서가 아닌 단지 '여성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거나, 남성들의 시선의 포착물, 단순한 대상인 여성에 대한 개념을 강화시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가부장제 사회에는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스머프 마을의 성비가 50 : 50이라면 어떨지 상상할 수 있는가?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가 방송에서 본 바와 같은 유토피아는 분명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이상적인 마르크스주의 국가는 성(性)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것이 평등할 때만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여성인 스머프 마을은 거의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 깊이 내재하는 성차별주의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스머프들에게 여성이 '자연스러운' 성(性)이라면 왜 그들이 모두 스머페트처럼 생겨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아름다움의 개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근거나 '금발의 귀여운' 같은 표현으로 등식화된 외연의 틀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4) 동성연애자 천국인 스머프 마을
스머프 마을은 스머페트가 오기 전에는 항상 전부 남성 뿐이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절대다수가 여전히 남성이다. 이것은 그들이 일반적인 방법(여성에 의한 출산)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며, 그들 사회에서는 '이성애(heterosexuality)'가 규범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느 사회보다도 순수한 민주주의에 가까웠다고 믿고 있는 아테네와 같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정부는 모든 사람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란 남성만을 가리킨다. 여성은 공적인 행사에 참여하도록 허 용되지 않았다. 아테네에서 동성애는 드문 것이 아니었으며 특별히 눈살을 찌푸릴 만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스머프도 스머페트와 관계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그녀가 덩치 스머프와 편리 스머프의 어린애 같은 연애 경쟁의 초점이 되기는 하지만, 마을 안 어디서도 진짜 이성애의 긴장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적인 덩치 스머프와 편리 스머프는 스머페트 보다는 서로에게 인상을 주는 것에 더 흥미를 느끼는 듯이 보인다. 스머프 마을에 오랫동안 여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스머프들은 스머페트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확실히 자연은 스머프들에게 남녀간의 접촉의 경우를 보여줬을 것이고 그들은 그것을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여성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이성애 또한 없었다. 따라서 어떻게 스머페트가 다른 스머프를 유혹할 수 있겠는가? 제작자들은 이성애가 존재하지도 않고 이성애의 매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언급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성애는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말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점에 대해서, 나는 제작자들은 제외시키기로 했다. 우리 사회에서 이성애는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그들은 아마도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덩치 스머프, 목수 스머프, 허영이 스머프가 남성동성연애자의 전형이라고 믿는다. 허영이 스머프는 영국의 시트콤인 "Are you being served?"와 같은 인습적인 연예 산업에서 보편적으로 보여지는 종류의 동성연애자이다. 반면 목수 스머프와 덩치 스머프는 "Village People"과 같은 맥락에서 극도의 인습적인 남성성으로 과장된 동성연애자의 전형이다. 게다가 덜렁이 스머프와 똘똘이 스머프는 동성연애자 커플의 전형을 보여 준다.
5) 결론
나는 Peyo가 우화적인 동화의 형식을 빌어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을 재현하고자 시도했다고믿는다. "스머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세계를 조명함으로서 뛰어난 판타지 문학으로 성공하고 있다. "스머프"가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보여주는 우화라는 증거는 매우 많다. 나는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매력은 이 유토피아적인 이상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비록 현실 세계에서 이뤄지기엔 너무 개연성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상상할 수는 있다.
written by J. Marc Schmidt (translated by Lee Duckjean)
머그컵등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토끼 캐릭터가 20세기초 여류작가가 창조해낸 캐릭터였다는 것을 이 영화를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 캐릭터가 바로 피터래빗입니다.
영화 '미스포터'는 피터래빗 이야기(http://www.peterrabbit.com/)로 유명하다는 영국의 동화작가 베아트릭스포터의 삶과 사랑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동화는 영국 문학계의 살아있는 신화이자, 무려 100년 동안 전 세계 1억부 이상, 30개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합니다.
'브리짓존슨의 일기'로 세계 영화계에 등장한 르네 젤위거와 훈남 이완 맥그리거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보면 재미있을 듯.
다만 영화가 너무 착해서 밋밋한 구성이 걸작이라고 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때론 이런 착하고 아름다운 영화가 우리 삶에 필요하지요.
디비디와 인터넷이 발달한 작금의 현실은 시네필에게는 천국입니다. 90년대초 문화학교서울등 소규모 시네마테크등에서 구린 비디오화면과 조잡한 스크립터로 보던 영화들을 뛰어난 화질로 안방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신이 우리에게 내린 축복이라고 밖에 말할수 없습니다.
그나마도 보고싶어도 보지 못하던 영화들이 수두룩했지요. 영화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수많은 영화들이 텍스트에서만 존재하지 실재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했지요. 이젠 르미에르, 그리피스,에이젠쉬타인, 트뤼포등 원하는 영화면 언제 어디서든지 구해서 볼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10년전만해도 거실에 채플린전집과 큐브릭의 전집이 버젓이 자리잡고 있을 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매주토요일 가족이랑 프로젝트로 옛 영화를 보는 재미가 기막힙니다. 특히 어릴때 명화극장에서 보았던 영화를 다시보는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지붕위의 바이올린' '사랑은 비를타고''오즈의 마법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등등. 세대를 뛰어넘는 걸작들이죠. 요즘은 '키즈' '써커스'등 채플린을 다시보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제가 찾아 헤메던 영화가 바로 시드니 루멧의 '12명의 성난 사람들'들입니다. 중학교 시절 고정영일씨의 해설로 시작된 어렴픗한 기억속에 영화입니다.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법정드라마입니다. 즉 여기에서 말하는 12명은 미국법정의 배심원 숫자입니다. 빈민가 출신의 미천한 소년이 자신을 폭행해왔던 양아버지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구속되고, 확실할 것은 증거도 있고 목격자도 있고 변호사도 그의 무죄변호를 포기한 누구나 그의 유죄를 의심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외롭게 의문을 품었던 단 한사람의 설득으로 상황이 반전되어 간다는 내용입니다.
이 영화는 1957년작으로 흑백의 단조로운 화면과 편집기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카메라가 배심원실을 떠난 적도 없고, 판사도 피고인도 등장하지 않으면서 오직 대사로만 영화의 긴장도를 유지합니다. 관객들로 하여금 지루할틈도 주지 않고 영화는 질주해 나갑니다. 대단하죠.
이 영화속의 12명의 인간군상들의 모습은 나의 모습이기도 하도, 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사물과 사건을 쉽게 예단하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 말입니다. 군중심리, 계급적 차별의식, 중산층의 나태한 사고, 어릴적 아버지와의 갈등때문에 오디푸스컴플렉스의 늪에 빠져 교통을 겪는 남성들이 나타납니다.
무엇보다도 민주주의를 생각하게 합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아니라 토론과 논쟁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편견에 사로잡혀 빨리 결론을 내리려는 사람, 특정지역, 특정인종에 대한 편견으로 사람의 모양새를 단정하는 사람, 논증보다는 목소리 큰것으로 제압하려는 사람,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다수의견에 묻어가려는 사람, 논쟁상대에 대한 편견으로 상대의 말이라면 무조건 힐난으로 일관하고 반대하는 사람, 소수의견에 용기를 주려고 격려하는 사람, 합리적이지만 논쟁에 끼어들지 않으려는 사람등등 이 영화속의 배심원들을 보면 각자의 모습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조금씩 보게됩니다.
만들어진지 정확히 50년전의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지금도 강렬한 힘을 발휘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보시면 엄지손가락 두개를 치켜 세울 것입니다. 신의 축복으로 디비디로 출시되어 있습니다.
헨델이 2주만에 완성한 Rinaldo는 1711년,헤임 마키트에 있는 런던의 대표적인 가극장 "퀸즈"(뒷날의 킹즈)극장에서 초연되,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작품 못지 않게 카스트라토 니콜로 그리말디의 가창, 헨델의 쳄발로 즉흥 연주가 한몫을 단단히했다고 합니다. Lascia ch"io pianga"는 헨델의 `리날도" 2막에서 여주인공 알미레나에 의해 불려지는 아리아로 십자군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웅 리날도와 상관의 딸 알미레나와 적군의 여왕 아르미다가 삼각관계로 어우러집니다. 산의 요새에서 아르미다의 포로가 된 알미레나가 자신의 운명을 탄식하며 풀려 나기를 기원하는 비탄의 노래입니다.
Lascia ch'io pianga la durasorte e che sospiri la liberta, e che sospiri e che sospiri, la liberta! Lascia ch'io pianga la durasorte e che sospiri la liberta, Il duol infranga queste ritorte di' miei martiri sol per pieta, di'miei martiri sol per pieta.Lascia ch'io pianga la durasorte e che sospiri la liberta, e che sospiri e che sospiri, la liberta! Lascia ch'io pianga la durasorte e che sospiri la liberta
나를 울게 하소서 비참한 나의 운명!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나를 울게 하소서 비참한 나의 운명!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이슬픔으로 고통의 사슬을 끊게 하소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울게 하소서 비참한 나의 운명!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나를 울게 하소서 비참한 나의 운명! 나에게 자유를 주소
지금까지 본 수많은 영화중의 결혼식 장면중에 가장 성스럽게 묘사한 장면을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지붕위에 바이올린중 큰딸의 결혼식장면 입니다.
특히 아버지가 딸을 시집보내면서 느낀 인생의 회한을 담은 가사는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저같은 40대에겐 특별히 가슴에 와닿습니다.
Sunrise Sunset
Is this the little girl I carried? Is this the little boy at play? I don't remember growing older. When did they? When did she get to be a beauty? When did he grow to be so tall? Wasn't it yesterday when they were small?
이 처녀가 내가 안고 다니던 바로 그 작은 소녀인가? 이 청년이 놀이에 열중하던 그 장난꾸러기 소년이었던가? 나는 나이먹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언제 저들은 이렇게 나이가 들었나? 그 작은 소녀는 언제 저렇게 미인이 되었지? 그 남자아이는 언제 그렇게 키가 커졌나? 그들이 작고 귀여운 꼬마들이었던 시절은 이제 지나버린 시절이었던가
Sunrise, sunset. Sunrise, sunset. Swiftly flow the days. Seedlings turn overnight to sunflowers, Blossoming even as we gaze. Sunrise, sunset. Sunrise, sunset. Swiftly fly the years. One season following another, Laden with happiness and tears.
해가뜨고, 해가지고, 해가뜨고, 해가지고 세월은 화살 처럼 흘러가고 있는거야 어린 나무는 밤 사이에 꽃으로 피어나고 우리가 보고 있을때도 피어나고 있구나 해는 뜨고 해는 지고, 해는 뜨고 해는 지고 세월은 쏜살같이 지나가네. 한 계절은 또 다른 계절로 바뀌어 가네 행복과 슬픔의 눈물을 실은 채로.
원스(Once)를 보았습니다. 상당히 잘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 두주인공이 우연히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 진행되어 가는 이야기를 오버하지 않고 잘 끌고가는 연출력이 돋보입니다. 물론 음악의 힘도 있겠지만 스토리라인이 흩트러지지 않고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요.
이와 비슷한 영화로 밀회Brief Encounter (1946) 라는 작품을 들수 있습니다. 가정을 가진 두남녀가 서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아슬아슬하게 어긋나는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도 원스와 이야기가 일맥상통합니다.
나인송즈, 키즈, 숏버스같은 노골적인 성묘사 영화나 '관타나모 가는길'처럼 극장에 상영되기에는 어려운 다큐멘터리, 장 꼭또나 멜리어스의 흑백영화를 보고 싶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여행을 떠나면서 무료한 버스나 기차안에서 영화를 보고 싶다면? 변기에 앉아서 일보면서 영화를 보는 것이 가능할까?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인터넷이다. 인터넷은 과거와 현재, 아프리카와 헐리웃등 세상 모든 영화를 볼 수 있는 영화의 저장고이며 극장이다. 극장이나 안방이 아닌 화장실이나 기차안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가능해지게 만들어냄으로서 영화가 갖는 주술적 의미에서 진정으로 해방하게 만들어낸 혁명적 도구이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20세기의 새로운 산업이전에 신흥종교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세상과 차단된 어두운 극장안에서 한줄기 밝은 빛에 의존하여 별세계를 만들어 간다.
지금까지 인류는 이런 예술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종교가 수많은 사람들을 회당으로 모이게 하듯이 영화가 극장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였으며, 연극등의 공연이 관객들의 반응과 교감하면서 발전하는 것이라면 영화는 매우 일방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종교적이다. 교감하기보다는 일방적이며 개인적이기 보다는 집단적이며, 현실세계의 고통이나 번뇌를 잊기위해 교회를 찾듯이 극장을 찾게 한다는 점에서 종교와 아주 비슷하다. 돈과 권력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그들의 의지반영의 대상으로서 종교와 영화가 갖는 의미는 동일하다.
영화의 이런면을 통찰한 선각자들은 에디슨의 최초영화인 ‘프레드 오트의 재채기’보다 1년뒤 1895년 12월28일 프랑스 파리. 뤼미에르 형제가 그랑 카페에서 10초도 안되는 필름 「열차의 도착」 「공장의 출구」 등을 유료로 상영한 것을 영화의 시발점으로 삼았다.
에디슨의 영화는 키네토그래프라고 하는 상자안을 들여다보는 영화로 집단적인 관람이 불가능한 영화형식이었다. 하지만 뤼미에르의 영화는 많은 대중앞에서 공개적으로 상영되었으며 돈을 받고 상영되었다는 점에서 영화의 아버지라고 불리운 것이다. 영화는 연극처럼 대중앞에서 공개되어야하는 매체였던 것이다.
20세기 말까지 이같은 영화의 정의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홈비디오의 보급으로 영화의 집단성이 약화되었다고 하지만 영화제작자 권력안에서 번성한 현상이고 장소도 안방이나 거실로 제한되어 있었다.
기독교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로 성경책이 대중화되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듯이 영화라는 신흥종교는 인터넷이라는 기술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영화는 집단성을 조금씩 잃어가고 은밀한 사적인 취향이 되어 갈 것이다. 이제 극장은 개인이 가는 모든 공간과 시간속에 놓이게 될 것이다.
교회의 영향력이 줄었다고 해서 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지 않았듯이 극장의 영향력 감소가 영화의 영향력 감소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영화가 다른 예술과 달리 무한복제되어 상영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극장과 필름이라는 고비용 복제에서 극저비용 무한복제 시대로 진입하게 되면서 전혀 다른 차원에서 영화의 의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한복제는 헨드폰이나 PMP같은 소형가전부터 액자나 커튼, 거울같은 일상용품으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제한 복제될 것이다.
영화는 숭배와 숭고라는 종교적 의미가 퇴색하고 일상이되어버릴 것이다. 그런점에서 영화는 무한한 영향력을 확보하게 될 지도 모른다.
영화의 다운로드가 일반화되면 영화의 의미 뿐만 아니라 형식이 바뀔지 모른다. 인터랙티브한 영화가 게임과 접목될 수 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에 맞는 영화가 서비스 될 수있으며 때로는 관객이 영화의 생산자 역할을 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영화는 관객과 교감하고 유연하게 변형되며 극히 개인적인 매체로 변하게 될 것이다. 2시간이라는 상영시간도 제한을 받지 않는 200시간대의 대하소설같은 영화도 나올 수 있으며, 초창기 영화때처럼 2분여의 짤막한 소품도 영화라는 매체에 자연스럽게 실릴 것이다.
고로 영화의 아버지는 뤼미에르에서 에디슨으로 다시 고쳐 써야 하는 세상이 도래하게 된 것이다. 단순히 활동사진으로서가 아니라 영화매체가 갖는 속성으로서 말이다.
디비디와 인터넷이 발달한 작금의 현실은 시네필에게는 천국입니다. 90년대초 문화학교서울등 소규모 시네마테크등에서 구린 비디오화면과 조잡한 스크립터로 보던 영화들을 뛰어난 화질로 안방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신이 우리에게 내린 축복이라고 밖에 말할수 없습니다.
그나마도 보고싶어도 보지 못하던 영화들이 수두룩했지요. 영화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수많은 영화들이 텍스트에서만 존재하지 실재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했지요. 이젠 르미에르, 그리피스,에이젠쉬타인, 트뤼포등 원하는 영화면 언제 어디서든지 구해서 볼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10년전만해도 거실에 채플린전집과 큐브릭의 전집이 버젓이 자리잡고 있을 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매주토요일 가족이랑 프로젝트로 옛 영화를 보는 재미가 기막힙니다. 특히 어릴때 명화극장에서 보았던 영화를 다시보는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지붕위의 바이올린' '사랑은 비를타고''오즈의 마법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등등. 세대를 뛰어넘는 걸작들이죠. 요즘은 '키즈' '써커스'등 채플린을 다시보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제가 찾아 헤메던 영화가 바로 시드니 루멧의 '12명의 성난 사람들'들입니다. 중학교 시절 고정영일씨의 해설로 시작된 어렴픗한 기억속에 영화입니다.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법정드라마입니다. 즉 여기에서 말하는 12명은 미국법정의 배심원 숫자입니다. 빈민가 출신의 미천한 소년이 자신을 폭행해왔던 양아버지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구속되고, 확실할 것은 증거도 있고 목격자도 있고 변호사도 그의 무죄변호를 포기한 누구나 그의 유죄를 의심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외롭게 의문을 품었던 단 한사람의 설득으로 상황이 반전되어 간다는 내용입니다.
이 영화는 1957년작으로 흑백의 단조로운 화면과 편집기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카메라가 배심원실을 떠난 적도 없고, 판사도 피고인도 등장하지 않으면서 오직 대사로만 영화의 긴장도를 유지합니다. 관객들로 하여금 지루할틈도 주지 않고 영화는 질주해 나갑니다. 대단하죠.
이 영화속의 12명의 인간군상들의 모습은 나의 모습이기도 하도, 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사물과 사건을 쉽게 예단하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 말입니다. 군중심리, 계급적 차별의식, 중산층의 나태한 사고, 어릴적 아버지와의 갈등때문에 오디푸스컴플렉스의 늪에 빠져 교통을 겪는 남성들이 나타납니다.
무엇보다도 민주주의를 생각하게 합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아니라 토론과 논쟁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편견에 사로잡혀 빨리 결론을 내리려는 사람, 특정지역, 특정인종에 대한 편견으로 사람의 모양새를 단정하는 사람, 논증보다는 목소리 큰것으로 제압하려는 사람,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다수의견에 묻어가려는 사람, 논쟁상대에 대한 편견으로 상대의 말이라면 무조건 힐난으로 일관하고 반대하는 사람, 소수의견에 용기를 주려고 격려하는 사람, 합리적이지만 논쟁에 끼어들지 않으려는 사람등등 이 영화속의 배심원들을 보면 각자의 모습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조금씩 보게됩니다.
만들어진지 정확히 50년전의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지금도 강렬한 힘을 발휘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보시면 엄지손가락 두개를 치켜 세울 것입니다. 신의 축복으로 디비디로 출시되어 있습니다.
베토벤이 휘갈겨쓴 악보를 깨끗하게 정리하는 작곡가를 꿈꾸는 여자필사와 말년의 베토벤과의 우정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100% 픽션입니다.
9번 교향곡이 울려퍼질때 전신에 울려대는 감동은 어마어마 합니다. 또한 영화전편에 흐르는 베토벤의 음악도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다만 엉성한 플롯과 사실관계의 취약함때문에 감상을 방해합니다. 베토벤은 9번을 작곡할때에는 전혀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베토벤과 여성필사간의 사랑과 갈등을 그리기 위해 어떻게 보면 정상인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때에 따라선 귀가 안들리는 것으로 설정되었다가...